광주양림교회 ()

개신교
단체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가 1904년 창립한 광주 양림리교회가 북문안교회 시절을 거쳐 남문밖교회로 발전하게 된 이후에 1924년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와 분립하여 양림교회로 재창립된 개신교 교회. 기독교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광주양림교회는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이 창립한 광주교회(광주금정교회)에서 1924년 분립한 개신교 교회이다. 1904년 유진 벨(E. Bell)이 양림리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양림교회). 1906년 북문 안으로 이전하며 북문안교회로 개칭했다. 1919년 교인들의 3·1운동 참여로 교회가 폐쇄되자 남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남문밖교회). 1920년 북문안교회(현 광주중앙교회)가 분립했다. 1924년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가 분립했다. 현재 양림동에는 3개 교단(통합, 합동, 기장) 소속 양림교회가 있다.

정의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가 1904년 창립한 광주 양림리교회가 북문안교회 시절을 거쳐 남문밖교회로 발전하게 된 이후에 1924년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와 분립하여 양림교회로 재창립된 개신교 교회. 기독교회.
개설

1904년 양림리교회가 설립된 이후로 1906년부터 1919년까지는 북문안교회로 존재했다. 1919년 3월 10일 교인들의 3 · 1운동 참여로 북문안교회가 폐쇄되자, 남문밖(금정 소재)에 교회당을 세웠다. 이로부터 남문밖교회로 불렸다. 1924년 임시노회에서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로 분립 이후 교단이 1953년 기장 · 통합으로 나누어지고 통합에서 1970년대 후반 합동교단이 생겼다.

설립목적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정책에 따라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1898년 목포에서 선교를 시작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광주 선교를 위해 1904년 12월 선교사 벨(E. Bell)과 오웬(C. C. Owen)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김윤수(金允洙) · 변창연(邊昌淵) 등과 함께 양림리(楊林里)에 사택을 마련하고 12월 25일 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양림교회의 시작이다. 이 교회는 공간이 비좁고 교통이 좋지 않아 1906년 6월 북문안 사창골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전했으며, 1912년 김윤수 · 최흥종(崔興琮)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고,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로 개칭하였다.

기능과 역할

1919년 3 · 1운동 때는 최흥종을 비롯한 다수의 교인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일제로부터 교회가 폐쇄되어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리다 10월 남문 밖 금정동 101번지에 부지를 구입하여 이전하였으며, 남문밖교회로 불리웠다.

1920년 경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가 분립했고, 다시 1924년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가 분립하였다. 김창국(金昶國) 목사 등 다수 교인은 양림리 오웬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리다 1926년 예배당을 신축 · 이전하였다.

양림교회에는 인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많이 출석했으며, 강연회 · 토론회 등도 자주 개최했고, 교회 청년들은 광주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아 광주지역의 각종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7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김현승(金顯承) · 백영흠(白英欽) 등 양림교회 청년들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해방 후 1953년 장로교 총회 분열(기장 · 예장) 시 ‘자유주의계열’의 신학자 김재준(金在俊) 목사 지지자들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양림교회로 분립했고, 그에 반대한 ‘보수주의계열’ 교인들은 오웬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리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을 유지하였다. 이어 1963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차이로 연동파와 승동파가 분열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양림교회도 다시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황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는 3개 교단(기장 · 통합 · 합동) 소속 양림교회가 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양림교회는 인근 숭일학교 · 수피아여학교 ·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등과 함께 대한제국기인 1900년대 광주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사회운동 · 계몽운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신학노선상의 갈등으로 분열을 거듭했으며, 광주 최초의 교회가 어디인가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광주 선교와 남도 영성 이야기』(이덕주, 진흥, 2008)
『광주제일교회 100년사』(김수진,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제일교회, 2006)
『양림교회 100년사』1·2(차종순, 기장·통합·개혁양림교회, 2003)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차재명, 기독교창문사, 1928)
집필자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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