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중앙교회 ()

개신교
단체
1907~1908년 경 중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된 장로교회.
이칭
이칭
용정교회, 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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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7~1908년 경 중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된 장로교회.
개설

용정중앙교회는 장로교·감리교 교인들이 연합하여 설립하였으며, 장로교 선교구역에 편입된 이후 간도지역 종교활동은 물론 민족운동·계몽운동의 중심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설립목적

간도지역 한인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 및 신앙생활 지도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용정중앙교회의 설립연대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1905년, 1907년, 1908년 등으로 달리 나오지만 1907년설이 유력하다. 1907년 장로교인 안순영(安順永)·정재면(鄭載冕)과 감리교인 이화춘(李和春)·이응현(李應賢) 등이 용정에 들어와 전도하며 함께 야소교서원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용정중앙교회의 시작이라고 한다. 초기에는 용정교회 또는 중앙교회라고도 불렸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구역이 조정될 때 간도는 장로교 선교구역으로 결정되어 용정중앙교회도 장로교 소속이 되었다. 같은 해 함경북도에 근거를 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그리어슨(R. G. Grierson)은 김계안(金桂顔) 조사(助事)를 용정에 파송했는데, 야소교서원에 위치한 용정중앙교회의 당시 교인은 구춘선(具春先)·박무림(朴茂林)·이보영(李輔永)·최정식(崔貞植)·한봉희(韓鳳熙)와 김계안의 가족 등 17명이었다.

1910년 예배당을 신축한 용정중앙교회는 1912년 함경노회로 편입되었으며, 1913년 김내범(金迺範)이 파송되었다. 그는 1914년에 장로로 장립되었고, 이로써 당회가 구성된 용정중앙교회는 북간도의 첫 번째 조직교회(組織敎會)가 되었다. 1913년에는 바커(A. H. Barker), 1914년에는 푸트(W. R. Foote) 등 캐나다선교회 선교사가 파송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하며 용정중앙교회도 지도하였다.

1917년 제1회 함북노회가 용정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1918년에는 용정중앙교회에 성서학원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용정중앙교회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삼국부인전도회가 조직되었으며, 전도대를 조직하여 북간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교세가 확장되면서 토성보(土城堡)교회와 동산(東山)교회가 용정중앙교회에서 분립되었다. 1918년 박예헌(朴禮獻)이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기능과 역할

용정중앙교회가 중심이 된 용정촌은 명동촌(明東村)과 함께 북간도 교민들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도 수행하였다. 용정중앙교회 교인들은 1910년 조직된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에도 적극 참여했고,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으며, 구춘선·박무림 등은 북간도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용정중앙교회 청년회는 매주 토요일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했으며, 영신(永信)소학교와 중학교, 야학교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간도노회, 1925년 동만노회에 소속되었으며, 1927년 용정중앙교회 청년회는 면려청년회로 발전하여 1928년 조직된 동만연합면려회를 주도하였다. 1932년 문재린(文在麟) 목사가 부임했고,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아 희년전도회(禧年傳道會)를 조직하였다. 1939년 전만조선(全滿朝鮮)예수교장로회연합회에 편입되었으며, 1940년 당시의 담임목사는 문재린이었고 교인 수는 905명이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접수하면서 1946년 용정중앙교회는 폐쇄되었다.

의의와 평가

용정중앙교회는 용정을 비롯한 일대 교민들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계몽운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민족운동에서도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일제하 재만한인의 종교운동』(고병철, 국학자료원, 2009)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서굉일,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8)
「일제하 재만한인의 종교운동: 1910~20년대 북간도를 중심으로」(최봉룡, 『종교연구』31, 2003)
집필자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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