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면려회 ()

개신교
단체
일제강점기 한국 장로교단 산하 교회에 조직된 기독교 청년단체.
이칭
이칭
면려청년회, 기독청년면려회,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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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기독면려회는 일제강점기 한국 장로교단 산하 교회에 조직된 기독교 청년 단체이다. 면려청년회, 기독청년면려회, C.E.라고도 한다. 기독면려회는 1881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의 목사 클라크가 기독 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 활동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한국에서는 1913년 경 새문안교회에 설립된 기독면려회가 최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면려회는 청년들의 신앙 지도를 위한 기도회·전도회 등을 개최하고, 계몽운동과 문맹 퇴치, 금주, 단연을 통한 절제 운동도 추진하였다. 해방 이후 장로교의 분열에 따라 기독면려회 조직도 교단별·지역별로 활동하고 있다.

정의
일제강점기 한국 장로교단 산하 교회에 조직된 기독교 청년단체.
개설

세계적 청년조직인 기독면려회는 1910년대 한국에 설립된 이래 장로교단 산하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신앙훈련은 물론 1920~1930년대 계몽운동 · 농촌운동 · 절제운동 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설립목적

미국에서 창설될 당시 기독면려회의 설립목적은 “기독청년층의 신앙과 사회활동의 증진”이었다. 이후 국제기독면려회가 조직되면서 “회원들간의 진실한 기독교적 삶을 장려하고, 그들 상호간의 교제를 넓히며, 교회활동을 위해 회원들을 훈련시키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이웃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그들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연원 및 변천

기독면려회는 1881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의 회중교회 목사 클라크(Francis Edward Clark)가 기독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활동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이후 캐나다 · 멕시코, 영국 · 프랑스 · 독일 등 유럽으로도 확산되어 초교파 청년조직인 국제기독면려회(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가 조직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892년 중국 푸저우〔福州〕의 선교사 헐버트(Helbert)가 세계 순방 중인 클라크 목사를 만나 처음으로 기독면려회를 조직하였다. 클라크 목사는 일본의 도쿄〔東京〕 · 코베〔神戶〕에도 기독면려회를 조직하였다.

한국에서는 1913년경 새문안교회에 설립된 기독면려회가 최초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서울 승동교회사리원 · 풍산 · 함흥 · 북청 등지에도 설립되었으나 1919년 3 · 1운동으로 활동이 중지되었다가 1920년 이후 다시 활동이 재개되었다.

1921년 앤더슨(W. Anderson) 선교사가 경상북도 안동읍교회에서 기독면려회를 조직했고 이어 경북지방 면려청년연합회가 설립되었으며, 같은해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는 교회마다 기독면려회(C.E.)를 조직하기로 가결하였다.

1923년에는 황해도 전역과 전주 · 평양 · 안주와 블라디보스톡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에는 서울 피어선성경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1925년 기관지 『진생(眞生)』을 창간하였다.

192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8회 총회에서는 매년 2월 첫째 주일을 면려주일로 제정하여 기독면려회를 장로교 청년조직으로 발전시켰다. 1932년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 산하에 면려부를 설치했는데 1934년 현재 회원이 3만 명을 상회하였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며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기독면려회 활동도 위축되었다. 일제는 같은해 6월 제8회 전조선면려회 금주운동 전단에 나오는 내용을 문제삼아 이대위(李大偉) · 이용설(李容卨) · 정인과(鄭仁果) 등 면려운동의 핵심인물을 검거하였다. 결국 1938년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조선연합회의 해체를 가결했고 총회 면려부는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

해방 후 재건된 기독면려회는 1947년 10월 새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회 전국연합회 창립총회를 통해 조직이 정비되었으며, 1953년에는 전국연합회가 기독청년면려회 전국연합회로 환원되었다. 1957년 기독면려회(C.E.) 조직은 고등CE(1217세), 청년CE(1827세), 장년CE(28~45세)으로 구분되었는데, 이후 장로교의 교단 분립에 따라 기독면려회도 분열을 거듭하였다.

기능과 역할

기독면려회는 청년들의 신앙지도를 위한 기도회 · 전도회 개최는 물론 각종 강습회 · 강연회 · 토론회를 개최하고 노동야학 · 부인야학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과 문맹퇴치, 금주 · 단연을 통한 절제운동에도 노력하였다.

현황

해방 이후 거듭된 장로교의 교단 분열에 따라 기독면려회 조직도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장로교의 교단별 · 지역별로 기독면려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기독면려회는 장로교 청년들의 신앙조직이었으나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을 보유한 장로교의 전국 조직을 바탕으로 1920~1930년대 계몽운동 · 농촌운동 · 절제운동 등을 전개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 면려운동사』(김남식, 성광문화사, 1979)
「1920~30년대 기독청년면려회 연구」(김덕, 『한국기독교와 역사』18, 2003)
「한국교회 면려청년회 운동사」(김일재, 장로회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집필자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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