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했다. 1902년 기독교를 믿고, 고향에서 예수교소학교에 들어가 1904년 5월 졸업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1907년 6월 제4회로 졸업했으며, 숭실대학에 입학하여 1911년 5월 제3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숭실중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1912년 교사직을 사임하고 중국을 여행하다가 1913년 밀항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4년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태평양대학 보습과를 수학한 후 로스앤젤리스 성경학원(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에 들어가 1917년 6월에 수료했다. 이어서 센프란시스코 산안젤모신학교(San Anselmo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1919년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휴학했으며, 동년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파송을 받아 황진남과 함께 안창호를 수행하고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착, 안창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했고, 정인과는 7월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에서 미국령 교민대표로 의원에 선임되어 교통위원장을 맡았다가 8월 임시의정원 부의장이 되었다. 9월 임시정부 통합 개편 때는 외무부 차장을 맡아 겸무하게 되었다. 그후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1920년 10월 외무부 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교에 복학, 1921년 4월 산안젤모신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9월 프린스턴대학교 신학연구과에 편입해 신학사 학위를 받고, 이어서 같은 대학교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1923년 7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과정에 들어갔으나 1924년 6월 중퇴하고 영국과 중국을 거쳐 11월 말경 귀국했다.
1925년 2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으며,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를 맡았고, 1935년 9월 장로회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구속되어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언도를 받았으나, 검사의 항소로 1940년 8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을 받는 동안에 변절하여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상무이사 겸 총간사를 맡았고, 1940년 1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를 맡았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맡았다. 1941년 8월 장로회 중앙상치위원회에서 전시체제 실천 성명서 발표에 참여했고,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과 회장을 맡았다.
1942년 4월 기독교신문협회 회장 겸 이사를 맡아 기독교계 언론을 통폐합한 『기독교신문』을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부일협력 활동을 하였다. 1945년 7월 개신교 교파들이 통합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출범할 때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5월 특별재판부의 재판을 받았으나, 건강 때문에 보석되었다. 1953년 7월 서울 상도동에 방우린보육원(신희망보육원으로 개칭)을 설립 운영했다. 1960년부터 3년간 경기도 문산 법원리장로교회를 담임한 후 은퇴하여 경기도 파주·송탄 등지에 은거하다가, 1972년에 사망했다.
정인과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56∼28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