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신한민보 주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교육, 직업알선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목사·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이어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분교]에 진학해 1916년에 졸업했고, 산안젤모의 태평양신학교(太平洋神學校)도 마쳤다. 재미 한인단체였던 국민회(國民會)의 상항지방회장과 총회장대판[대리]을 거쳐, 1913년부터 1919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교포 언론활동에도 참여해 1910년경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발행한 월간 종교잡지 『대도(大道)』를 주재하였다. 또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편집에도 관여했고, 국민회 총회장 재임시에는 신한민보의 주필도 겸하였다.
특히, 1915년 인터타이프(Intertype) 한글 식자기를 발명해, 신문의 발행을 원활하게 하였다. 『신한민보』는 1970년까지 이 식자기를 사용해 발행되었다. 또, 종교활동도 활발히 전개, 1911년부터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이민 초기의 한인사회에서 이민 자녀에게 한글을 교육했으며, 사진 혼인을 주례했고, 이민교포들의 숙소와 직장을 알선하는 등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후에는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관련해 이승만(李承晩)과 워싱턴에서 회합하기도 하였다.
성격은 강인하면서도 청렴하고 겸손했고, 직접 몸으로 희생했던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병원에서 죽었으며, 사이프러스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제국시기신문연구』(최기영, 일조각, 1991)
- 『미주이민 100년』(민병용, 한국일보사출판국, 1986)
-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1959)
- 『新韓民報』(1915.3.11., 1926.11.18., 1928.6.21., 1928.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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