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멕시코 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안선의 길이가 9330㎞에 달한다. 면적은 196만 4375㎢, 인구는 1억 2173만 6809명(2015년 현재), 수도는 멕시코 시티(Mexico city)이다.
종족은 원주민 29%, 메스티조 55%, 백인 15%, 기타 1%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어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나 원주민은 고유언어를 쓰고 있다. 종교는 92%가 가톨릭교를 신봉하며, 개신교가 6%를 점유한다.
기후는 저지대는 고온다습하고 고지대는 온난하며, 북부는 사막성 기후와 스텝 기후, 남부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원유 등 부존자원이 풍부하고, 1946년부터 평균 성장률 6%를 웃도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미국 시장과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1980년대와 90년대 초 외채상환 문제 및 자본유출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조 2252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7026달러이다. 이 나라는 대통령 중심제의 연방공화제로서,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6년의 상원(128석)과 임기 3년의 하원(50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국민행동당(PAN), 제도혁명당(PRI), 민주혁명당(PRD), 노동당(PT) 등이 있다.
기원전부터 조직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멕시코의 원주민은 16세기 초 스페인에 정복될 때까지 마야(Maya) · 톨테카(Tolteca) · 아즈테카(Azteca)의 발달된 문명을 보유하였다.
원주민 사회를 정복한 스페인은 원주민 사회를 온존시킨 채, 스페인왕이 파견하는 부왕(副王, Viceroy)을 정점으로 하는 식민사회로 재편하였다. 식민사회는 스페인에서 파견된 식민관료, 멕시코에서 출생한 백인(Criollo),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Mestizo), 그리고 원주민으로 이어지는 엄정한 계급사회였다. 식민관료가 멕시코 사회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크리올료는 대토지소유제에 기반을 둔 경제력을 향유하였고, 메스티조와 원주민은 대농장(hacienda)에서 혹사당하는 노예(peon)로 전락해갔다.
1810년 9월 16일 신분해방을 원하는 메스티조와 정치권력을 원하는 크리올료가 결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켜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독립전쟁을 이끈 이뚜르비데(Iturbide, A.)의 왕정은 3년 만에 종식되고 1824년 공화제 헌법이 반포되었다. 독립과 더불어 노예의 형식적 해방이 선언되었으나 그 뒤 1세기 동안 대토지소유제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노예제도는 오히려 광범위하게 자리잡았다.
멕시코의 정치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지방분권주의자와 보수주의적인 중앙집권주의자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19세기 전반에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 텍사스 등 국토의 절반을 미국에 빼앗기거나 할양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멕시코는 디아스(Diaz) 체제라고 불리는 독재체제하에서 광범위한 외국자본의 침투와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을 받았고, 1910년 마데로 · 까란사 · 오브레곤 · 사파타 · 판초 빌라 등이 각기 이끄는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막대한 인적 · 물적 피해를 야기하면서 7년이나 지속되었고, 1917년 2월 5일 신헌법(Carta Magna)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1934년 혁명세력을 결집한 멕시코혁명당이 결성되었으며 1946년 제도혁명당으로 바뀌었다.
그 뒤 매 6년마다 평화적인 권력 이양이 이루어지고 있고 중앙집권제의 확립, 군부의 축소 및 중립화, 정교분리가 촉진되어 중남미 국가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있다.
대외정책은 중도우익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내정불간섭, 민족자결,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제3세계 경제질서의 확립을 기조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이민이 멕시코에 첫 진출한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생활이 곤궁한 275가구 1,003명(남자 802명, 부녀자 및 어린이 231명)이 1905년 4월에 인천항을 떠나서 멕시코로 이주하였다.
첫 이민은 불행한 이민으로,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殖民合資會社)와 일본인 다이조(大庭貫一)와의 계약으로 출국하였고, 이들은 멕시코의 대지주에 인계되는 즉시 혹독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병사하였고, 일부는 멕시코 각지로 흩어졌다. 1921년 3월 이들 중 288명은 쿠바로 이주하였다. 한국이민 80여 년이 지난 현재 교포 1세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2, 3세가 멕시코인과 동화하여 일부는 정부관리를 비롯하여 의사 · 교수 · 기술자 등으로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일찍이 1948년 12월 12일 우리나라를 승인하였고, 6·25전쟁 중에는 유엔의 긴급구호계획에 의거하여 약 35만 달러 상당의 곡물 및 약품을 원조한 바 있다.
양국은 1962년 1월 26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우리나라는 1962년 7월 멕시코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고, 멕시코 정부도 1978년 3월 우리나라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다. 멕시코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양국 간 우호증진을 위하여 (Sociedad Mexico-Corea A. C.)가 1967년 2월 발족하였으며, 교민단체로 멕시코한인협회가 있으며 교민회관도 건립되어 있다. 민간경제협력 촉진을 위하여 1968년 5월에는 대한상공회의소와 멕시코기업인연합회 간에 경제협력위원회(Joint Meeting of Korea-Mexico Economic Cooperation Committee) 설치에 합의하여, 양국간 통상 및 경제협력방안을 활발하게 협의해 오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1981∼1982년에는 멕시코에 3500만 달러 상당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1965∼1997년에는 69명의 기술연수생을 초청하여 지도하였다.
양국은 1966년 4월 문화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66년 12월에 무역 협정, 1979년 3월에 일반사증면제 협정, 1988년 7월에는 항공 협정, 1989년 11월에는 협정, 1991년 9월에는 과학협력 협정, 관광협력 협정, 경제사회개발기획협력 협정을 체결하였고, 1994년 10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6년 11월에는 범죄인인도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05년 9월에는 형사사법공조조약, 세관상호지원 협정, 광물자원협정 약정, 무역구제기관간협력 약정, 정부혁신분야협력 약정, DMB협력약정 등을 일괄 체결한 바 있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멕시코 수출액은 108억 5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평판디스플레이 · 선박 · 칼라TV · 자동차 및 부품 등이며, 수입액은 32억 7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아연광 · 자동차 및 부품 · 무선통신기기 및 부품 · 은 등이다.
제24회서울올림픽에는 140명의 멕시코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대우, 삼성, LG 등 직접 투자 69개 회사와 갑을, 금호 등 12개 지사가 진출하여 있으며, 한국민 교민 4248명과 체류자 1만 328명이 체류하고 있다.
한편, 북한과 멕시코의 관계는 1968∼1970년 사이 멕시코 청년들이 북한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은 사실이 폭로되어 양자 관계는 동결되었다. 그러나 이후 북한은 멕시코정부의 보편주의 외교정책에 편승하여 1980년 9월 9일 수교를 하였고, 1993년 9월 북한 대사관이 멕시코에 개설되었다.
양측은 1976년 6월 통상협력 약정을 체결하고, 2001년 8월에는 원산시-프에블라시간 친선도시설정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우리나라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계기로 멕시코에 민속무용단을 파견하여 문화재(현, 국가유산)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우정의 표시로 멕시코시티 내 차풀테펙(Chapultepec) 공원에 한국정(韓國亭, El Pabellon Coreano)을 건립하여 기증하였다.
한국민속무용단은 1975·1978·1982년에 멕시코를 순회 공연하였다. 1978년에는 민화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멕시코도 1979년도 문화전시회를 우리나라에서 순회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