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최흥종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최흥종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최영종(崔泳琮), 오방(五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1966년
본관
탐진(耽津)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
관련 사건
국채보상운동|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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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최흥종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1966년에 사망했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대동의상회를 조직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1908년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윌슨의 어학선생으로 있다가 1914년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광주 지역의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무등산에 칩거하며 병자와 빈민들과 활동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오방(五放),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1907년 세례를 받고 ‘흥종(興宗)’으로 개명하였다.

생애

1880년(고종 17) 5월 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최학신(崔學新)과 국씨 부인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5세 때 모친을 여의고 계모 공씨(孔氏)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1895~1900년 사이 강명환과 결혼하였다. 1966년 5월 14일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

1904~1905년 사이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김윤수(金允洙)와 함께 양림리교회(楊林里敎會: 광주양림교회)를 중심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순검(巡檢)이 되었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병기(徐丙冀)와 함께 대동의상회(大同義償會)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순검으로 있으면서 일경에 체포된 광주 · 전남지역 의병들을 몰래 풀어주거나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07년 순검을 사직하고 잠시 광주농공은행에 다니다 1908년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의 어학선생 겸 광주선교진료소(광주제중원의 전신) 직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북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광주제중원에 재직하면서 1914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2월 김필수(金弼秀) · 김철(金鐵)과 함께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를 만나 광주지역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어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을 나눠주며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1920년 6월 출옥하여 8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 의사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밖교회(지금의 광주 중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다. 시베리아선교를 시도하였다가 좌절된 후 1923년 광주소작인연합회(光州小作人聯合會)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4년 광주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광산회 총무(1923), 서선수해구제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 금정교회 목사(1924~1925), 광주수해구제회 위원(1925), 광주여고보창립 기성위원(1926), 광주협회 위원(1926)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에 나섰으나 소련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4월 귀국하였다. 이어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어 민족운동을 재개하였고,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1927), 광주교육보급회 이사(1928),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1928),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1928) 등을 역임하였다. 1929년 7월 제주도 모슬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1931년 7월 사직하고 이후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를 창립하면서 구라사업(救癩事業)과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였다.

1937년 1월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 · 빈민들과 함께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고, 8월 17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全南建國準備委員會)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 호남신문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1964년 12월 「유언장」을 작성하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한 후 5월 1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화광동진의 삶』(광주YMCA 역사편찬위원회, 광주YMCA, 2000)
『영원한 자유인: 오방 최흥종 목사의 생애』(문순태, 광주YMCA, 1976)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민족운동」(한규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호남교회사에서 복음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 오방 최흥종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중심으로」(차종순, 『한국기독교와 역사』 1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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