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의 동생이며, 윤웅렬이 백부이다.
1911년 서울 교동보통학교와 1915년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도쿄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를 수료했다.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1918년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체육부장과 사교부장, 1922년 재일조선기독교청년회 사교부 간사로 활동했다.
1922년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헤이스팅스대학, 콜럼비아대학, 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32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 1934년 아메리칸대학에서 국제법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시절인 1928년에는 재미한인유학생총회 사교부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학업을 하는 동시에 1923년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노선을 추종해 하와이한인회, 대한민국임시정부구미위원부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동아일보 주미통신원, 1924년 10월 하와이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태평양』의 주필, 1928년 뉴욕에서 창간된 『삼일신보』의 발기인, 편집부원으로도 활동했다.
1935년 귀국한 이후, 1936년 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흥업구락부 간사가 되었고, 1938년 5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9월 3일 신흥우 · 갈홍기 등과 함께 이른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된 이후 친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940년 1월 「황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함」이라는 글을 『청년』에 발표했으며, 1941년 8월에는 삼천리사에서 주최한 임전대책협의회의 대좌담회에 참여했고, 9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칭한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판매대에 참여했다. 같은 달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매일신보』 · 『동양지광』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의 중앙지도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 발기인과 총무부 역원으로 참여해 외무부 부장이 되었고, 10월 이승만의 귀국 이후에는 비서실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어 외무위원회와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했고, 1949년 12월에는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3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선임되었고, 1956년 부통령선거에 대한국민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해 2월 중앙상임위원, 5월 의장이 되었다. 1965년 12월 서울특별시장,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다. 1996년 2월 9일 사망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69)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