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월파(月坡). 전라남도 고흥 출신. 아버지는 화일(和日)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전문부에 해당)를 졸업하였다.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을 거쳐,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재임 중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을 복역하였다.
광복 후 관계에 진출하여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가 되었다. 1948년 조선전업사장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2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국회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 4월 자신을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徐昌善)을 살해한 사건으로 복역, 8년째 되던 해 4 · 19혁명으로 출옥하였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부의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 제15차 UN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 5월 남북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검찰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63년 자민당 최고위원을 거쳐 민중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그 해 제6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정치투쟁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6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67년 민주사회당을 대중당으로 개칭, 제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야당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과 공당으로서의 합당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 입당하였으며, 그 해 개인적으로 통일문제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교외의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나의 옥중수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