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출신. 1925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서재필(徐載弼)·김활란(金活蘭)·신흥우(申興雨) 등과 함께 참석, 성명을 통하여 총독정치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6, 1927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新報)』의 주필로 교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1931년에는 영국에 건너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이때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으며, 특히 김두봉(金枓奉)과는 한글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1935년 조선어학회에 참여, 사전편찬사업의 재정적 뒷받침을 담당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에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