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을 때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동학군 토벌에 참여,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의 참모관으로 발탁되었다.
그해 10월 공주 외곽 이인(利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경리청대관(經理廳隊官) 윤영성(尹泳成)의 참모관으로 일본군 100인과 함께 동학농민군과 싸웠다.
관군과 일본군은 한때 이인을 점거하였지만 농민군의 수에 비하여 워낙 열세였기 때문에 패퇴하고 말았는데, 그 전투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대흥군수(大興郡守)에 임명되었다.
그뒤 일본어를 배워,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당시 평안북도 의주군수로서 일본군 북진대(北進隊)의 접응관(接應官)을 맡았다. 그 공으로 곧 외부참서관이 되었고, 1904년 2월에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과 함께 내정간섭적인 내용을 담은 한일의정서 조인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일로 인해 민간 각 단체로부터 이지용과 함께 매국적신(賣國賊臣)으로 성토되었고, 일부 민간인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2일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공으로 그뒤 친일정권에 의하여 승진을 거듭, 1905년에는 육군참령·육군법원이사·경무사를 역임하면서 칙임관2등(勅任官二等)의 지위에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