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주. 화원(畵員) 고진승(高鎭升)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9월 일곱가지 항목의 긴급한 일을 들어 시무상소를 올렸다.
첫째 서구의 기예(技藝)를 학습할 것, 둘째 식무(識務)가 있는 사람을 널리 구할 것, 셋째 광산을 개발할 것, 넷째 50호(戶)를 1구(區)로 하여 구마다 장(長) 1인을 둘 것, 다섯째 상회소(商會所) 및 국립은행을 설치할 것, 여섯째 인천항에 해군을 둘 것, 일곱째 용관(冗官)·잡공(雜貢)을 없앨 것 등이다.
특히, 서양기술 도입과 관련해서는 서양 각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를 신장하고, 그곳의 기술교사를 청하여 우리나라 상하 인민들에게 새 기술을 습득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 공의당(公議堂)을 설치하여 시무에 밝은 인사들을 참여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정사(政事)의 논의를 돕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와같은 사상은 이미 동도서기적 차원(東道西器的次元)을 넘어서 본격적인 개화사상단계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채서(採西)의 대상을 서양기술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도·법제의 차원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개화사상가들과의 관련은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