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왕실의 지관(地官)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98년 과천군수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당시 중추원 부의장이며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尹致昊) 등이 상소문을 통해 고종의 총애를 빙자해 각종 뇌물을 받는 등 간사한 자로 지목, 비난받기도 하였다.
이 해 11월 19일 고종이 혁파된 황국협회의 복설(復設)을 허가하자, 보부상들에 의해 13도부상도반수(十三道負商都班首)가 되어 황국협회와 보부상들을 지휘하였다.
수구파 대신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11월 21일 홍종우(洪鍾宇)·박유진(朴有鎭) 등과 함께 황국협회의 부상단(負商團)을 동원해, 독립협회측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던 만민공동회를 습격할 때 선두에서 몽둥이를 들고 지휘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이튿날 법부에 의해 유배령을 받았으나,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유배되지는 않았다. 이 달 26일 고종의 칙유(勅諭)로 부상(負商)을 혁파하는 대신 유배형에서 풀려났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고종 황제의 전제정치가 확립되어 가던 1898년에는 육군참위를 거쳐 농상공부 농상국장에 임명되었다. 3월에 복설된 보부상 단체인 상무회사(商務會社)의 도사무(都司務)를 맡기도 하였다. 1902년에는 육군참령(陸軍參領)·철도원감독을 겸임했고, 1903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904년 7월 봉상시부제조(奉常寺副提調) 송규헌(宋奎憲) 소를 올려 “육군부령(陸軍副領) 길영수는 간사한 무리로서 성총(聖寵)을 빙자해 민재(民財)를 약탈하고 관작을 매매하는 등 나라를 병들게 하고 정치를 해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고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