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국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여러 학교의 교원과 각종 청년단체를 거쳐 자유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다. 1914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릿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외국어학원, 숙명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교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에는 우익 청년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 여당인 자유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자유당 내 비족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5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정계 활동이 없다가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14년 7월 20일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다.
함흥고등보통학교 4학년 중퇴 후, 일본 나카노중학교[中野中學敎]와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경성외국어학원, 휘문중학교, 광신상업학교 등에서 교원으로 있었고, 정치대학과 숙명여자전문학교에서 강사 겸 교무부장으로 재임하였다.
해방 직후 시기 우익 청년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공인 돈암동 시장조합 조합장, 조선민족청년단 이사, 서북청년회 중앙집행위원, 대동청년단 학생국장, 대한청년단 선전국장, 국민회 기획위원 등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민주국민당 당무부차장, 국민방위군 정훈과장 등으로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기에는 여당인 자유당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1952년 3월 29일 원외자유당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고, 1953년 1월에는 대한청년단을 대표하여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내 족청계와 비족청계의 갈등 때문에 3월 말 해면되었다. 진승국은 자유당 내 비족청계 인사로서, ‘대 족청 제일선 투사’, ‘족청 타도의 수훈갑’ 등으로 불렸다.
1953년 11월 자유당 조사부장으로 선정되었다. 진승국은 박용만과 함께 자유당 내 소장파의 중심 세력으로, 배은희, 이갑성 중심의 노장파와 대립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중앙선거대책위원, 당헌수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갑 선거구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자유당 공천에서 김종규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 자유당 중앙정책위원,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추진위원회 지도위원, 개헌안 심의위원, 개헌 선전대책위원 등에 이름을 올렸다.
자유당 조사부장 자리를 유지하며 의원부에 대응한 중앙당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국애국단체연합회의 정부통령선거추진위원회 책임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6월 자유당의 이기붕 중심 주류파와 의원부가 당의 부차장직을 차지하면서 원외 주도 세력이던 진승국은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대한중앙산업주식회사 취체역사장(取締役社長)에 취임하였고, 1957년 3월에는 자유당 정책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복 지구인 강원도 양양 선거구의 자유당 공천을 받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자유당 탈당계를 제출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총 9인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자유당 공천을 받은 이동근이 1만 366표로 당선되었고, 진승국은 3,633표를 얻어 5위에 그쳤다. 이후 한동안 정치 활동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기인 1963년에 민정당 창당준비위원회의 발기인과 중앙조직위원에 이름을 올렸고, 군정 연장 반대를 위한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하였다. 같은 해 군정연장반대전국투쟁위원회 기획부장, 민정당 섭외부장 등으로 선정되었다.
역서로 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의 생애를 다룬 『여기 한 인간이 있다[Magsaysay Story]』[신교출판사, 1959]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