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은 1960년 6월 12일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이종률의 지도와 영향을 받고 있던 김상찬(金相賛) 등이 ‘민주민족청년동지회’를 기반으로 부산지역 청년들을 규합하면서 조직되었다.
처음 조직되었을 당시 민민청은 이종률이 관여하고 있던 부산대와 국제신보 관련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후 민민청은 대구와 서울 등지의 진보적 청년그룹과도 접촉하였다. 그 결과 대구지역에서도 서도원(徐道源), 도예종(都禮鍾) 등을 중심으로 한 민민청 경상북도연맹이 만들어졌다.
부산과 대구 민민청은 각각 맹원이 1,0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부산에 있던 중앙맹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부산과 대구의 민민청 간부들이 서울로 이주하였고, 여기에 이수병(李銖秉), 김금수(金錦守) 등 이른바 ‘암장그룹’의 성원들이 합류하여 민민청의 서울조직을 결성하였다. ‘암장그룹’은 1955년경 부산 시내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이념서클이었다.
민민청의 기본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① 우리는 미래사회를 담당할 민족역군으로서의 정대한 인격과 선진적인 과학력의 양성을 위해 노력한다. ② 우리 조국의 역사과정이 특권 보수나 사회민주주의 등 개량 및 관념주의가 아니며 민족민주혁명임을 이해하고 모든 민족역량을 총집결한다. ③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의 청년의 권익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특히 노력청년 및 여성청년의 이익 보호를 위해 노력한다. ④ 우리는 세계민주 청년운동과 제휴한다.
민민청은 1960년 4월 혁명 직후 등장한 혁신정당들의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를 개량주의로 비판하고, 반외세민족자주와 민족혁명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그 결과 통일방안 역시 ‘중립화통일’이 아닌 ‘외세 배격의 남북협상론’을 주장하였다.
민민청은 1961년 초 전개된 ‘2·8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과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적극 참여하였고,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족건양회, 사회당 인사들과 함께 ‘민족자주통일협의회(약칭 민자통)’라는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은 1961년 5월 초 ‘민족통일연맹(약칭 민통련)’ 대학생들이 주도한 ‘남북학생회담’ 추진에도 적극 동참하였으나, 곧이어 발생한 5·16군사정변으로 조직이 해체되고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