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2월 27일 정부는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 4년간 711시간의 교련 이수와 대학에 현역 교관을 파견하는 교련 강화책을 발표하였다. 이에 1971년 3월 신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은 학원 병영화가 박정희 정부의 장기 집권을 위한 조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며 각 대학별로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3월 초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교련반대투쟁은 4월까지 계속 이어져, 4월 중순 경에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교련반대투쟁의 와중에 1971년 4월 14일 서울대 상대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12개 대학생 300여 명이 모여 교련철폐, 공명선거캠페인 등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약칭 민주수호전학련)’을 결성하였다. 1970년대 최초의 학생운동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수호전학련의 위원장은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약칭 후사연)의 심재권(沈載權)이, 대변인은 서울대 법대 사회법학회의 이신범(李信範)이 각각 맡았다.
민주수호전학련은 출범 직후 교련반대투쟁을 잠시 중단하고 4월 27일에 실시될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감시하고자 1,000여 명의 선거참관인단을 편성해 전국 각지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부정선거규탄, 야당의 국회의원 선거 보이콧 촉구 등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재야에서 만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이름에 호응하여 ‘민주수호’라는 말을 앞에 붙인 점이나 결성 이후 실제 활동들을 보았을 때, 민주수호전학련은 학생운동 세력들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조직한 측면이 강했다고 평가된다.
민주수호전학련은 서울대 후사연의 심재권, 서울대 법대 사회법학회의 이신범, 고려대 한국민족사상연구회(약칭 한사회)의 오흥진(吳興振),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약칭 한연회)의 이상문(李相文) 등이 참여한 덕분에 주요 대학 이념서클의 연합기구로서 위상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직된 것은 중앙위원회에 불과했고, 하부조직은 만들지 못했으며, 민주수호전학련에는 여전히 참여하지 않은 학생운동 세력들이 많았다. 특히 연세대 한연회 내의 윤재걸(尹在杰)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서울대의 심재권, 이신범이 주도하는 흐름에 반발하면서 1971년 5월 20일 9개 대학 학생들을 모아 ‘범대학 민권쟁취청년단(약칭 민권쟁취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교련반대, 국회의원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는 민주수호전학련과 달리 범대학 민권쟁취청년단은 교련강화반대, 국회의원 선거 참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수호전학련의 심재권, 이신범과 민권쟁취청년단의 윤재걸은 접촉을 계속하였고, 1971년 6월 12일 민주수호전학련과 민권쟁취청년단은 마침내 ‘전국학생연맹(약칭 전학련)’으로 통합을 이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전학련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 선포로 해산될 때까지 학생운동을 계속 이끌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