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21일부터 동의대학교 총학생회 간부 등 30여 명은 학교 내 입시부정 문제의 진상규명 요구하며 총장실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학생들은 점거 농성 기간 동안 각종 학내외 문제와 관련한 가두시위도 함께 전개하였다.
5월 1일에도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시위를 막기 위해 경찰이 24발의 공포탄을 발사하였다. 흥분한 학생들은 다음날인 2일에 교문 앞 삼거리로 진출하여 공포탄 발포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다 사복경찰 5명을 붙잡아 학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도서관 7층 농성장 옆 세미나실에 이들 경찰들을 감금하였다.
이에 5월 3일 오전 5시 10분경 경찰은, 학생들에 의해 동의대학교 도서관 건물에 감금되어 있는 경찰 5명을 구출하기 위하여 5개 중대를 동원, 전격적인 진압작전에 돌입하였다. 도서관으로 진입하는 경찰에 맞서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도서관 7층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고층건물 농성장 진입에 필수적인 투신대비용 매트리스, 고가사다리 등은 물론 소화장비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경찰 20여 명이 이 불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결국 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동의대학교 학생 94명이 현장에서 연행되어 그 중 76명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 20명에게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혐의가 적용되었는데, 총학생회장를 비롯해 4명에 대해서는 살인혐의가 추가 적용되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사법부는 이들의 고의적인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하였으나, 화염병을 던지는 등 화재 당시 특정한 행위를 한 4명과, 사건 당시 동의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4명 등에게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혐의를 적용,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하였다.
그밖에 다른 학생들에게도 징역형 혹은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가장 논란이 되었던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과 관련해서는,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고, 결국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재판이 종결되고 말았다.
2002년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사건 당시 학생으로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46명을 사학비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가’로 인정하고, 이에 따라 보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민주화보상심의위는 “방화치사상 등 유죄가 선고됐지만 살인에 고의가 없었던 등의 사유를 참작할 때 발생 결과가 중대하다는 것만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부인할 사유는 못 된다”며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경찰 7명이 사망한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큰 논란이 일어났다. 이후 2010년에는 ‘동의대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당시 진압 경찰들에 대해서도 명예회복과 보상이 함께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