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2월, 정부는 대학생들의 4년간 711시간의 교련 교과목 이수와 대학에 현역 교관을 파견하는 교련 강화책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대학에 대한 통제 강화에 맞서 1971년 3월 초부터 대학생들은 학원의 자유, 자주를 외치며 교련반대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부의 학원 자주성 침해와 이로 인한 폐해는 대학생 뿐 아니라 대학 사회의 한 축인 교수들도 함께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국공립 대학의 교수들은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서 그 심각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에 1971년 8월에 들어서 서울대 교수들을 선두로 전국 각 대학에서 대학의 자유와 교권을 확보하자는 교수들의 대학자주화선언운동이 전개되었다. 먼저 8월 18일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은 전체교수회의를 통해, 현재 학원의 동요는 학원 내 제반 현실의 근본적인 결함에 인한 것이며, 이를 제거하고 건전한 학원 질서를 정상화하는 것이 교수들에게 주어진 본연의 사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정부에 ① 대학의 자율성 보장, ② 교수 처우 개선, ③ 도서 및 실험시설 확충, ④ 승진제도 개선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의 이와 같은 ‘자주선언’ 이후 20∼21일에는 서울대 공대, 농대, 상대 교수들의 선언이 뒤따랐다. 23일에는 서울대 전체 교원 998명 중 513명이 대학 강당에 모여 교수협의회 긴급임시총회를 열고 대학 자치의 제도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하였다.
대학교수들의 학원 자주화 요구는 지방 국립대학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경북대와 부산대 교수들도 8월 23일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대학 자주화를 천명하였다. 이어 9월 초까지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충북대, 강원대, 부산수산대, 진주농대, 제주대 등 10개 지방 국공립대학이 자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9월 13일에는 지방 국립대학 교수협의회에서 자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또한 일부 사립대학에서도 ‘사학의 자주화 선언’이 발표되었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교수들의 대학자주화선언운동에 대한 지지 성명이 나오기도 하였다.
대학자주화선언운동에는 교수의 처우 개선이라는 경제적 측면도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당시 대학교수 특히 국립대학 교수들의 연구 여건은 연구 자체를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열악했다. 부교수의 최저 봉급이 초급장교 월급보다도 적었고, 도서관 및 실험실습 시설의 상황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이 대학자주화선언운동의 중심은 아니었다. 그 핵심은 대학의 자율성 회복에 있었다. 서울대 상대 교수들은 ‘대학자치선언’을 통해 “이번 교수들의 움직임이 봉급 인상에 주목적이 있는 듯 항간에 오해가 있으나, 교수들의 주안점은 학원 자율성 보장에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대학교수들은 대학 구성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휴업령이 내려져 수업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를 보며, 대학의 자치권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또한 대학교수들은 정보사찰의 대상이 되어 학문의 자유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연구실에서 제자와 나눈 사적인 대화까지 감시당하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교련교육 실시와 강화 등의 대학 교육을 위한 정책 결정에서 대학교수들이 배제되었고, 대학생들의 교련반대투쟁 과정에서도 대학교수들은 무기력하게 이를 방관하거나, 정부의 요구에 따라 학생들을 처벌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교수들의 자주화 선언은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교수들의 이러한 대학자주화선언운동을 사실상 묵살했다.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국립대학 교수들의 요구와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 9월 11일 서울대를 방문하여 학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학원사찰도 근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10월 15일 위수령이 선포되어 무장군인들이 학원에 진주하면서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위수령 이후 대학 자치가 더욱 제약되는 방향으로 학칙이 개정되는 등 학원에 대한 통제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