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사건 이후 맞이한 1980년 초 민주화 국면에서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시위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대학생들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계엄해제와 신군부퇴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서울과 각 지방의 대학에서는 5월 2∼3일을 기해 일제히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5월 초순을 민주화투쟁 기간으로 정해 교내에서 계엄해제와 민주화 일정 촉진을 요구하는 시위와 강연 행사 등을 벌였다. 이러한 흐름은 5월 10일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5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그동안 자제해오던 도심에서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각 대학 학생회 간부들은 몇 차례에 걸쳐 연석회의를 가졌는데, 당분간은 교외시위를 자제하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교내시위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특히 각 대학 학생회 간부들은 당시 유포되었던 군부쿠데타 설과 관련하여 ‘군부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과 상관없이 5월 13일부터 연세대를 주축으로 하는 6개 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종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가두시위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던 전국 학생회장단은 13일 밤 고려대에 다시 모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인 후 그동안 자제해 왔던 교외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5월 14일 서울 시내에서만 21개 대학 7만여 명의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2원집정부제 구상을 즉시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지방에서도 3만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다음날인 15일에는 서울의 35개 대학과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나온 학생들 수만 명이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메웠다. 서울에서만 7∼10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진 시위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부상자들도 속출하였다.
이때 이미 광화문 일대에는 계엄군의 탱크가 진주해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서울 곳곳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생들 사이에 곧 군대가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위가 절정에 달한 저녁 8시 경 신현확(申鉉碻) 국무총리가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내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 실시’라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며 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결국 시위를 이끌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단 여기서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흔히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서울역 회군’ 뒤인 5월 16일 저녁부터 17일 오후까지 전국 55개 대학 학생 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5월 22일까지 비상계엄해제’, ‘연내 정권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의 조속한 천명’ 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곧바로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시작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