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23선언」)을 천명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이후 비동맹국가들이 늘어나고 유엔에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유엔의 기존 중국 대표였던 중화민국이 경질되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교체되자 유엔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유엔 외교가 강화되고 상주대표부 개설, 유엔 산하기구 및 전문기구 가입 등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제 한반도 문제가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다루어질 수 없게 된 현실에서 한국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서방권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전면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6월 23일 7개항으로 이루어진 「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남북 간 상호 내정불간섭과 상호 불가침,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 불반대,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며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대한민국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6·23선언」은 첫째,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북한의 정치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선언에서는 북한과 관련된 사항은 통일 시까지의 과도적 잠정조치로서 이것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6·23선언」은 1970년의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최초로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시부터 유엔과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유엔은 한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였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남북한 대결에서 유엔은 언제나 한국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반면 북한은 유엔의 권위와 기능을 부인해 왔고 유엔에 대한 북한의 접근은 차단되어 왔다. 「6·23선언」은 한국이 이 프리미엄을 스스로 버리고 유엔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셋째, 국제사회의 힘을 빌려 한반도에 안정적인 평화공존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정책의지를 담고 있다. 당시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남북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북한 측이 환경조건의 개선, 정치 군사문제의 우선 해결 등을 내걸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남한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남북한 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에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한 모티브를 제공할 필요성이 있었다. 북한을 유엔에 가입시켜 국제사회의 규범을 준수하도록 견제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신뢰구출을 해나가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라는 통일방안에만 고착되어 있던 데로부터 벗어나는 결과가 되었다.
넷째, 「6·23선언」은 그동안 금기시 해오던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한국은 미국이 소련·중국과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외교의 지평을 확대하는 한편 북한의 대서방권 진출 움직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대공산권 문호 개방은 1980년대 후반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함께 북방정책의 추진으로 연결이 된다.
「6·23선언」에 대해 북한은 “‘2개 조선’ 조작 책동이고 분열주의 노선”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후 남북 간에는 ‘유엔 동시가입’과 ‘단일 의석 가입’이 대립하는 양상을 빚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