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006년 5월 낙산사의 공중사리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불사리 1과를 담은 유리제 사리호, 금제합, 은제합, 청동합, 각각의 합을 싼 비단보자기, 발원문이 담긴 연기문(緣起文) 등 사리장엄구 일괄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불사리가 1692년에 봉안되었다는 기록은 탑비에 새겨진 내용과 일치하여, 사리탑과 비, 사리장엄구 등의 자료적 가치를 높여주었다.
낙산사에 전하는 공중사리탑은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에 유행한 팔각원당형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전체 구조는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 탑신과 옥개석을 갖춘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 등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사리장엄구는 탑신부의 상단에 있는 원형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구는 유리제 사리호, 금제합, 은제합, 청동합의 순서로 포개어져 있었으며, 각각의 기물은 비단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여 있었다. 금제합 안에는 색동 비단 1겹으로 싼 자주색 유리제 원형 사리호가 놓였으며, 그 내부에는 불사리 1과를 흰색 명주 솜 위에 봉안하였다. 또한 청동합 안에는 전체 4매로 이어진 발원문이 있었는데, 한지에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고 비교적 보존상태도 양호하였다. 발원문의 첫 머리에는 강희(康熙) 3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숙종 18년(1692)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국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萬壽無疆)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발원문이 있는 사리장엄구의 발견으로 탑비의 존재도 새롭게 주목되었다. 즉 발원문과 탑비의 기록이 거의 일치하여, 사리의 봉안 유래를 설명하는 자료로 탑비의 내용이 재검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중사리탑비의 지은이는 이현석(李玄錫, 1647∼1703)이며, 갑술년(甲戌年, 1694)에 제작되었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중앙 정계에서도 오랫동안 활약한 조선시대 후기 문신이다. 공중사리탑비의 내용은 낙산사가 위치한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탄, 낙산사의 위상과 관음신앙에 얽힌 영험, 공중에서 사리가 나타난 이적, 사리영험에 대한 견해, 공중사리탑 건립에 관한 기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불사리의 존재와 신앙, 사리장엄구와 공중사리탑이 만들어진 경위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사리장엄구, 탑비는 낙산사의 유서 깊은 사리신앙을 보여주는 일괄 유물이다. 이처럼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그와 관련된 직접 기록인 탑비가 함께 보존된 예는 많지 않다. 특히 사리장엄구에 봉안된 발원문과 탑비 기록의 연관성을 통해, 정확한 제작시기와 사리장엄의 조성 배경 및 과정, 의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된 사리구는 조선 후기 사리장엄 방식을 보여주며, 사리구를 감싼 비단 보자기도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직물사 연구에 보탬이 된다.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 봉안된 사리장엄구, 탑비 등은 17세기 후반 조선시대 불교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