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은 남북 분단 등의 사정으로 본의 아니게 서로 흩어져 만날 수 없게 되거나 소식을 모르는 가족이다. 한국의 현행법에 따르면 남북 이산가족이란 이산의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 인척, 배우자 또는 배우자이었던 자를 말한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에 납치자, 미송환 포로, 미귀환 공작원의 경우 ‘특수이산가족’으로 분류하였다. 이산가족 문제는 특정 개인이나 남북의 정치적 문제를 넘어 인도적,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
지난 60년간 이산가족 문제는 사회적 현상이고 분단과 전쟁의 상처였으나, 오랫동안 남북간 정치적 공방의 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산가족인가라는 정의조차 내리지 못한 채 2000년대에 이르렀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산가족의 모습은 시기마다 드러나는 양상이 달랐다. 예를 들면 1950, 1960년대에 이산가족이라 하면 대개 한국전쟁 당시 ‘납북자’ 가족을 가리켰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에 오면 흔히 ‘월남인’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2003년 2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가운데, 북측 이산가족 명단에 월남인 유가족이나 월북인 외에 납북인, 국군포로, 납북어부 등이 포함되면서 이산가족 문제는 단순히 정리되지 않는 문제가 되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산가족의 비극은 있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의 공녀제도(貢女制度)와 홍건적, 거란족의 침입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 및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의 연이은 외침(外侵) 속에서도 가족이산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이산가족은 전쟁과 정치적 격동의 부산물로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한반도 이산가족의 원형은 조선시대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해외로 강제이주 되어간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즉 일제강점기나 그 이전의 이산가족은 중국이나 구소련, 하와이, 일본 등지로 떠나는 이주자들(강제이주자들 포함)이 발생하면서 국내 유가족들과의 이산을 통해 형성되었다. 중국이나 구소련, 일본으로 이주한 상당수의 이주자들이나 일제의 강제징용, 징병정책으로 사할린이나 동남아 등지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과 연락을 하거나 상봉조차 어려웠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해방이 되어 귀환했지만, 귀환하지 못한 채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수백만여 이산가족들은 결국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 밖의 해외이산자들은 한반도에 세계적 탈냉전의 온풍이 불어오기까지 오랫동안 전형적인 이산자로 남아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으로 고착화된 분단은 이 땅에 이산가족을 낳는 새로운 악조건이 되었다.
전자는 다시 광복 후 38선이 장벽화 됨으로써 가족재회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와 중국․러시아 등지에 있다가 귀환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로 분류할 수 있고, 후자는 6․25전쟁 중 자유를 찾아 월남한 경우와 강제납북된 경우로 대별할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소련의 개혁과 해체, 독일의 동서통일,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몰락 등에서 비롯된 탈냉전 분위기와 김일성 사망, 극심한 식량난․경제난 등 북한 내부 요인들로 인하여 증가한 북한 이탈주민 역시 새로운 이산가족의 한 모습이다.
한국의 현행법에 따르면 남북 이산가족이란 이산의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 이남지역(남한)과 군사분계선 이북지역(북한)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인척 및 배우자 또는 배우자이었던 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산가족 중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전에 북한지역에서 월남한 자와 남한지역에서 월북한 자의 당시 가족을 이산 1세대로 규정하고 있으며 휴전 이전에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서 출생한 남한의 주민을 실향민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광의로 볼 때에는 ‘재결합에 따라 배우자, 형제자매의 혈족 및 인척으로서 신분관계를 회복, 형성하는 자’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고, 탈냉전적 입장에서 이산가족을 정의하자면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 이남에 고향과 가족을 두었으나 이북에 살게 된 사람이나, 이북에 고향과 가족을 두었으나 이남에 살게 된 사람들과 그 가족으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문화를 형성하게 될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산가족 개념 규정 문제는 현실적으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 ‘특수이산가족’ 또는 ‘광의의 이산가족’ 개념이 등장하면서 과거에는 이산가족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비전향기수, 납북자, 미송환 국군포로, 월북자, 탈북자 등을 이산가족으로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납치자, 미송환 포로, 미귀환 공작원의 경우 ‘특수이산가족’으로 분류하는 데는 대개 여러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 11월 말에 있었던 이산가족 2차 상봉에 납북자로 알려진 동진호 갑판장 강희근 씨가 나타남으로써 자연스럽게 소위 납치자도 이산가족 범주에 포함되어 1990년대까지의 협소한 이산가족 범주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산가족 문제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 정부가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고,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취급하면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산가족 상봉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법률개정 등 조치를 취하였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2001년 9월 현재 3차례의 이산가족 상봉, 1차례의 서신교환 사업이 실현되었다.
분단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이산가족 당사자인 1세대 대부분이 70세 이상의 고령이나 사망으로 급격히 감소되고 있어 교류와 재회의 시급성이 증대되고 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1세대 실향민은 거의 남지 않게 될 것이고, 역설적으로 이산가족 문제는 점차 소멸하게 될 것이다. 특히 헤어진 지 이미 반세기가 넘어 후계 세대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가족에 대한 친밀감과 관심도가 적어 이산가족 문제의 본질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 이산가족에게 통일이란 분단된 사회가 한 체제, 한 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롭게 교류하고 상봉하여 고향 방문도 하고 부모나 조상 제사도 같이 모시며, 경우에 따라서는 재결합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산가족의 통일 전망이면서, 동시에 가족으로서의 이산공동체를 회복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는 최근 설립된 이산가족면회소와 제정된 법률을 근거로 하여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 서신 왕래, 상봉 지원, 개별 방문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산가족 관련 단체들은 관용적이고 상호 양보와 연대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산가족 문제는 최소주의적 범주화가 아니라, 분단과 전쟁이 양산한 광의의 이산가족 개념과 유형에 주목해야 한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단 후세대들에게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공감을 얻어 내는 것이다. 분단되고 폐쇄된 가족을 넘어서는 인식이 필요하고 구체적으로는 남북의 열린 가족공동체의 형성과 사회적 공동체로의 확대가 필요하다.
『2005 인구주택총조사』(통계청)에 의하면, 이산가족은 71만 명(총인구 대비 1.5%)이며, 이 중 북한출신은 16만 명이다. 그리고 대한적십자사, 통일부, 이북5도위원회가 공동 운영하는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 등록된 이산가족 현황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1년 3월 31일까지 신청인 등록분은 전체 12만 8,532명으로 생존 81,198명, 사망 4만 7,334명이다.
이산가족을 범주별로 분류해보면 월남인과 월북인, 피납치인, 미송환 포로, 미귀환 공작원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각각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먼저 월남인 규모(1955년 센서스)는 전국 73만 5,501명으로 전쟁 전 28만 3,313명, 전쟁 중 45만 2,188명이고, 전후 월남인에 속하는 북한이탈주민은 2010년 12월 입국자 기준(통일부) 2만 360명이다. 그리고 월북인은 30여만 명으로 언급된다.
1953년 『대한민국통계연감』에서는 납북인(拉北人)의 규모를 8만 4,532명, 1955년 대한적십자사는 1만 7,500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납남인(拉南人)에 대해 1957년 당시 북한의 ‘조선적십자사’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나 국군 등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주장한 200만 명 중 1만 4,112명의 납남인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고 국제적십자사에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납남인의 경우 북파공작원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어 그 숫자나 현황이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2000년 9월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군적 정리 및 전산화 처리과정에서 통계처리된 사람은 미송환되어 북한에 남은 국군포로가 1만 9천여 명이며, 확보된 생존자수는 343명이다. 미귀환 공작원 규모는 1950년대 이래로 1999년까지 남파공작원은 6,446명이고, 195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북파공작원 중 북파되어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된 규모는 7,726명 정도로 밝혀져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이산가족 문제는 특정 개인의 문제이거나 남북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문제일 뿐 아니라 근대 이래로 세계적인 보편적 문제 가운데 하나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누가 이산가족인가를 논하는 목적은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서 이산가족에 대한 협소한 시선을 버리고,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인식을 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특히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 뿐 아니라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새로운 이산가족으로 북한이탈주민이 증가하는 시점에서 이산가족에 대한 적극적이고 확장된 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산 1세대의 노령 및 사망으로 점차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절실성이 흐려짐에 따라 더 늦기 전에 이산가족에 대한 진전된 논의와 인도적․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