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회 ()

반상회
반상회
사회구조
제도
행정단위의 최말단 조직인 반(班)을 구성하는 가구 대표자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월례회.
정의
행정단위의 최말단 조직인 반(班)을 구성하는 가구 대표자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월례회.
개설

거시적으로 보면 반상회는 중앙과 지방, 국가와 민간 또는 시민사회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상회는 지방행정이나 지방자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일종의 인보조직(隣保組織)이다.

변천

역사적으로 반상회와 유사한 사회적 제도에는 조선시대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있다.

1428년 단종 연간에 처음 실시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가작통법은 향약이나 호패법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시행된 것처럼 중앙권력과 재지(在地) 사림, 그리고 민(백성)이라는 3자 관계의 접점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정착된 오가작통제는 면리제(面里制)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제도적인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이후 19세기 말을 거쳐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어지면서 국가권력이 민간에 침투하는 주요한 기제로 기능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면서 반상회는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17년 일제는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반’이라는 명칭 하에 동리의 전 주민을 구획·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중국대륙 침략과 미국에 대한 전쟁을 도발(1941년 12월 태평양전쟁)하면서 일제는 전시 동원체제의 원활한 수행과 조선인에 대한 통제 강화를 배경으로 반조직을‘애국반(愛國班)'으로 고쳐서 주민생활 전반을 통제하고, 전시 동원하는 효율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반상회 조직을 부활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그 형태는 1948년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5·10 총선거 당시에 전국의 모든 마을에 일시적으로 조직한 ‘향보단(鄕保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1950년의 5·30 총선거를 치르기 위한 목적에서 18세 이상 50세 미만을 대상으로 ‘민보단(民保團)’이라는 이름으로 재조직되었다.

이른바 ‘반체제 세력’의 색출과 ‘실지 회복’을 내걸고 대중 동원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 달에 두 번씩 전국 차원에서 ‘국민반(國民斑)’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해 왔다.

그러다가 1957년에는 ‘반’이라는 명칭이 일본색이 짙다고 하여 ‘국민방(國民坊)’으로 고쳐서 운영을 강화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반조직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기 위하여 「지방자치단체법」과 그에 근거를 둔「시·군·통·반 설치조례」가 제정되었고, ‘국민재건운동’과 결합시켜 한 때 ‘재건반(再建班)’이라는 명칭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그 뒤 1967년 반원의 정기적 모임으로 반상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가, 유신 이후인 1976년 5월 말부터 관주도로 본격적으로 반상회가 운영되면서 전국적인 정례 반상회의 날(매월 25일)이 제정되었다.

내용

반상회 조직은 형태나 기능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면서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지속되어 왔다. 형태면에서 조선시대 오가작통제는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다시 매 5통마다 이정(里正)을 두어 통제하는 방식이었다면, 근대 일제시대 이후부터는 동리를 단위로 조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1970년대의 반상회를 보면 농촌에서는 자연마을을 단위로 하여, 도시에서는 근린성을 고려하여 20∼30가구 단위로 조직하고 반장이 이를 주재하였다.

기능면에서, 오가작통제는 강도·절도 방지, 풍속의 교화와 유민방지, 호적작성에서의 탈루자(脫漏者)를 방지하는 것 등이 주요 목적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농경을 서로 돕고 환란을 상호 구제하는 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유민 발생을 규제하고 각종 조세 납부를 독려하는 등 지배와 통제를 위한 도구로서 이용된 측면이 강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 지배력이 전통적인 생활공동체 마을(자연촌)의 강한 질서를 해체시키지 못하여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지배와 통제를 위한 기능을 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 반상회가 식민지 피지배민을 감시·통제·동원하기 위해 도입·운용되었던 것은 근대로 이행한 일제 시기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승만 정권에서의 반상회 역시 ‘국민 단합’을 표방하면서 실시되었으나, 실제로는 반공체제 유지를 위한 국민 동원과 감시·통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해방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시민에 의한 시민사회 영역이 발전하지 못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시민이 지배되어 왔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반상회는 주민 상호간 친목 및 상호부조를 도모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스스로 추진하며, 자치능력 훈련 및 민주생활 교육을 위한 장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마을의 실태 및 주민들의 요망 사항을 파악하여 행정에 반영한다는 목적을 표방하고 있었다.

1977년 내무부 발표에 따르면 반상회는 1976년 한해 동안 전국 25만 8,821개 반에 설치, 매달 평균 579만 1,600가구가 참석(참석율 85.8%)하였고, 총 42만 2,000건의 접수된 민원 중 28만 9,000건이 시책에 반영되어 건의사항의 68.5%가 해결되었다.

물론 이 시기 반상회도 실제로는 정부 시책을 홍보하거나 ‘보안 사범 색출 및 선도 기능’과 같이 지배체제의 유지·강화에 기여하고자 시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반상회가 지배체제의 유지·강화를 위해 이용된 것은 전근대 전제국가에서 식민지 시기를 거쳐 이승만 1인 독재 체제와 군사 독재 체제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사회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후 군사독재체제가 종식되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반상회는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반상회가 과거 관주도의 일방적이고 타율적 방식에서 벗어나서, 주민 서로간의 의사소통과 친목을 위하여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반면 2002년 부동산 광풍 이후 반상회는 집값 담합 등 이익집단화되거나 집단 민원 제기 등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공동체 문화가 쇠락하는 현시점에 반상회가 지역사회 새소식을 전달하고 주민간 친목을 도모하고 공동의 안건에 대해 토론하기 위한 주기적 모임이라는 취지로 복원되고 이어진다면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참고문헌

『반상회운영백서』(내무부, 1979)
『반상회의 시대적 의의』(내무부, 1978)
「반상회의 역사-국민동원과 통제의 수단에서 이익집단화까지」(김환표,『인물과사상』, 2011.4)
「오가작통법소고」(신정희,『대구사학』12·13, 1977)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김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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