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생리학에 이어 마지막으로 탄생한 과학으로 꼽힌다. 이런 과학적 심리학은 종래의 철학자들이 다루던 사색을 통한 심리학과 구별되며 관찰, 특히 실험을 주된 방법으로 사용한다. 많은 면에서 심리학은 자연과학의 일부로 자처하며, 문제를 엄격한 연구법에 따라 경험적으로 접근하는 특징을 지녔다.
이런 과학적 심리학은 1870년대 중반에 독일에서 분트(Wundt)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과학적 방법을 표방함으로써 새로운 과학적 심리학은 철학자의 심리학과 결별을 하게 되었다.
오늘의 심리학은 사회과학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이고 엄격한 접근을 취하는 학문으로 되어 있으며, 덜 엄격한 접근을 취하는 정신분석학이나 비과학적인 심령학 등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오늘날 심리학 (과학적 심리학)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 가장 많은 심리학자들이 살고 있고 또 그곳에 연구시설도 가장 많으며 연구도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심리학이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아직도 심리학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독일에서 심리학이 시작된 이래로 심리학계에는 차례로 구성주의, 기능주의, 형태주의, 행동주의, 신행동주의 등의 학파가 일어났으나 1950년대 이래에 이런 흐름들은 미국의 신행동주의의 큰 흐름에 흡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제 학파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각 학파가 즐겨 다루던 문제나 사용하던 접근방식을 “접근”(예: 행동주의적 접근)이란 이름으로 인정할 뿐이다. 60년대 이래로는 인지심리학적 접근이 새로운 접근으로 각광을 받아왔다.
심리학의 분야는 내용 면에서 크게 이론분야와 응용분야로 대별되는데, 전자에는 학습심리학, 동물심리학, 생리·생물 심리학, 지각심리학, 인지심리학, 성격심리학, 사회심리학, 심리측정, 발달심리학 등이 속하고, 후자에는 임상심리학, 산업심리학, 조직심리학, 상담심리학, 학교심리학, 군사심리학, 범죄심리학 등이 속한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원들이 가르치는 응용분야는 주로 임상심리학과 조직심리학에 한정되어 있다.
(1) 해방에서 6·25동란 직후까지
현재 한국의 심리학은 다른 대부분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서구에서 발전한 심리학을 계승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 이런 심리학이 정식으로 출발한 것은 해방 직후 한반도에 있던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 조선심리학회를 결성한 1946년 2월로 잡을 수 있다.
1946년 10월에는 서울대학교가 설치되어 그 안에 철학과와는 독립된 심리학과가 창설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1946년에 한국 심리학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심리학회는 뒤에 대한심리학회로, 다시 한국심리학회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직후 한반도에 있던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로는 임석재(任晳宰), 윤태림(尹泰林), 이진숙(李鎭淑), 이의철(李義喆), 이본령(李本寧), 서명원(徐明源), 방현모(方顯模), 성백선(成百譱), 이재완(李載琓), 그리고 고순덕(高舜德)의 10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한국심리학의 창시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 중 이본영과 이재완은 6·25동란 중 월북했고, 서명원은 미국 유학과 동시에 교육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고순덕은 이화여대 재직중 도미하여 끝내 귀국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실제로 일정기에 심리학을 공부하고 해방후 대한민국의 심리학계에서 오래 활동을 한 사람은 임석재, 윤태림, 이진숙, 이의철, 성백선 그리고 방현모 뿐이다.
실제로 한국에 서구식 심리학이 도입된 것은 1917년 무렵으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자학당에서 심리학 강의가 처음으로 제공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심리학 강의가 있었다.
사립학교 쪽에서 심리학이 주로 미국 심리학을 가르친 데 반해 1924년 출발한 일본정부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에서는 독일의 심리학을 강의하였다.
해방이 된 다음 해인 1946년에 서울대학교가 발족하면서 문리과대학 안에 심리학과가 설립되었고, 1947년에는 중앙대학교에, 그리고 1953년에는 이화여대에 심리학과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서울대 사범대에 교육심리학과가 설립되고, 다음해인 1954년에는 성균관대학교에 심리학과가 설립되었다. 1959년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심리학과를 만든 성백선이 고려대로 옮겨가면서 그곳에 교육심리학과를 열었는데, 이것이 1963년에는 심리학과가 되었다.
1962년에는 서울대 안에 학생지도연구소가 생겨 실질적으로 대학원생이나 대학원 졸업생들의 훈련과 연구를 돕는 역할을 했다.
1961년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학교정비 기준령에 의해 1952년 귀국한 정범모(鄭範模)가 이끌던 서울대 사범대 교육심리학과는 교육학과로 흡수되고 이화여대의 심리학과도 교육심리학과로 바뀌었다.
그래서 1963년 무렵에는 서울대, 중앙대, 성균관대, 고려대, 그리고 이화여대에 심리학과 또는 교육심리학과가 있게 되었다. 이들 학과는 모두 서울 일원에 분포되어 있었다.
1954년에서 1963년까지의 기간은 한국심리학에게는 전란으로부터의 회복기에 해당한다. 이때 해방 후 심리학 원로들에 의해서 교육받은 서울대 문리대 심리학과, 서울대 사범대 교육심리학과, 그리고 이화여대 심리학과 출신들이 교수직에 등장하였다.
또 이 기간은 대학원 교육이 본격 궤도에 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1962년 무렵에는 이들 교수의 반수가 석사학위를 갖추고 있었다. 이 기간에 위에서 본 5개 학과에는 차례로(서울대 46년, 이화여대 52년, 성균관대 58년, 중앙대와 고대 63년) 심리학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었다.
(2)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963년과 1973년 사이의 기간은 한국 심리학이 “이륙”을 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초기에는 연간 4편의 논문이 발표되던 것이 기간의 말인 1973년에는 62편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 현상은 여러 원인이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대학원을 졸업하는 학생의 수가 증가하면서 생긴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의 심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귀국해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대학원생들 중 일부가 산업이나 임상 등 분야로 들어가서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응용심리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의 3년간 (1974∼1977)은 내실화와 다변화의 시기이다.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심리학자의 수가 계속 증가했는데, 1976년 한국심리학회 회원 중 34명이 박사학위를 소지했으며, 이들 중 19명이 미국 대학에서, 2명은 서독 대학에서, 그리고 1명은 프랑스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20년 전인 1953년에는 단지 1명만이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
제대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을 가진 인력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며, 교수직을 가진 사람의 수도 1965년의 29명에서 1976년에는 75명으로 늘어났다.
1978년에서 1983년까지의 5년의 기간은 확산기이다. 이 시기에 지방대에 심리학과가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 부산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대구), 성심여자대학교(부천), 전남대학교(광주)에 심리학과가 설치된 것을 효시로 다음 4년 간에 12개나 되는 심리학과가 지방에 설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1983년 무렵에는 23개의 심리학과 (19개의 심리학과, 3개의 교육심리학과 그리고 1개의 산업심리학과)가 전국에 분포되게 되었다.
1976년에 6개의 심리학 관련학과가 있었던 것이 1983년 무렵에는 그 수가 거의 4배로 늘어난 것이다. 짧은 5년 사이에 서울에 한정되어 있던 심리학과가 전국에 분포되게 되었다.
{{(3) 1990년대 이후}} 1984년부터 1994년까지의 10년 간의 기간은 심리학자의 수가 꾸준한 증가를 보인 인력 증대의 시기이다. 1983년 248명에서 1994년에는 651명으로 학회 회원수가 2배 이상 증가하였다. 회원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다.
첫해인 1983년도에 회원 중 박사학위 소지자의 백분율이 28.6%이었으나 1994년에는 44.4%로 늘어났다. 이제 심리학계는 석사보다는 박사들의 활동무대로 변하였다. 학과의 증설도 계속되어 3개의 심리학과와 1개의 재활심리학과, 그리고 2개의 산업심리학과가 신설되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는 일종의 정체기로 볼 수 있다. 1994년에 651명이던 회원이 1995년에는 993명으로 증가했지만 이런 급작스러운 증가는 회장 선거제도의 실시에 따른 신입회원 끌어들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에는 회원수가 1,448명에 이르렀다. 박사 학위 소지자의 백분율도 1994년의 44.4%를 정점으로 1999년(회원 수=1,479)에는 38.5%로 하강했는데, 이것도 신입회원 등록 드라이브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1994년 이후에도 3개의 학과 (2개의 산업심리학과와 1개의 심리학과)가 신설되었다. 이화여대의 교육심리학과는 심리학과로 창설 당시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2000년 말 현재 전국의 심리학 관련 학과 수는 32개 (24개의 심리학과, 5개의 산업심리학과, 2개의 교육심리학과, 1개의 재활심리학과)에 이르고 있다.
해방후의 심리학이 일본 정부가 수립한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은 서구식 심리학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한국의 본래의 심리학의 토대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한 채 발전하였다.
해방 후에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의 영향도 있고 또 심리학의 중심지가 미국이었으므로 해방 후에 출발한 한국의 심리학은 줄곧 미국의 심리학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아왔다.
현재 한국심리학의 연구는 거의 모든 이론적인 분야와 임상, 상담, 산업, 조직, 그리고 각종 사회문제(여성, 범죄 등)의 분야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 연구들이 대체로 미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들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방법은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실험과 조사연구가 비슷한 비율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접근에서는 현재 미국에서 유행하는 인지심리학적 접근이 연구 분야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 유교나 중국 유교사상을 분석하는 연구나 한국의 문화를 다루는 연구들이 최근 생겨나고 있지만 방법에서 정통 심리학 연구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한국심리학의 과제는 내실을 다지는데 있다. 외양적으로 심리학자의 수나 심리학과 수, 또 심리학 관련 학회 수, 그리고 발표논문의 수에서 지난 10년 간 급격한 성장을 했으나 아직도 학회의 운영이 효율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하고, 또 연구의 질도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흔히 문제의 설정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이고, 특히 연구설계 면에서 부실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지적조차 나오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발표논문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나 비평(재 실험이나 비판적 분석에 의한)의 풍토가 전무한데, 공개적인 토론이나 비평 없이 연구의 질적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분위기는 하루 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경제수준이 더욱 높아지게 되면 그리고 세계와의 경쟁이 본격화되면 심리학의 수요는 높아질 전망인데, 이를 위해서는 연구나 서비스의 질적 향상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