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서양화에 대한 관심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18세기의 서학(西學) 태동과 함께 했던 서양문화에 대한 관심 및 중국 북경 내왕을 통한 서양화의 유입을 들 수 있다. 당시 진보적인 실학파(實學派) 학자들은 서학(양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화의 유채(油彩) 재료와 사실적 기법의 특이함에 경탄하였다. 그리고 그 수법의 객관적 합리성을 인정한 글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북경기행문과 국내에서 접촉한 바를 기술한 글에는 ‘양화’, ‘서양화’, ‘서국화(西國畵)’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유입되었던 서양화는 오늘날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당시 서울 화단의 일부 화가가 서양식 화법을 원용하려고 했던 사실을 김두량(金斗樑)의 「견도(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에서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1784년(정조 8)에 국내에서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태동하면서 서양화 수법의 천주상(天主像)과 기타 상본화(像本畵)가 암암리에 그려진 사실도 한국에서의 서양화법 수용의 한 줄기이다. 1801년(순조 1)에 순교한 천주교인 화가 이희영(李喜英)의 「앉아 있는 개」(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는 한지에 그린 묵화이지만, 묘사 수법은 완전한 서양화법이다.
1880년대에 접어들어 구미 여러 나라와 정식 국교가 이루어지면서 각종 서양문화가 급속히 도입되었는데, 이때 서양화에 대한 인식도 넓혀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희동(高羲東)이 처음으로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유화 활동을 시작한 것이 서양화법 정착의 시초였다. 그 뒤 신미술의 서양화가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종래의 전통적 수묵화 · 채색화와 본질적으로 다른 서양화의 사회적 개념을 일반화시키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서양화가의 현저한 증가와 서양화단의 설립 및 활기는 전통화단의 움직임과 양립되면서 한국 현대회화의 두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새 낱말인 ‘서양화’에 대한 상대적 개념의 전통 회화는 ‘ 동양화’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서양화는 ‘양화’로, 동양화는 ‘ 한국화’로 고쳐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