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는 한국의 전통적 재료와 양식 및 기법을 따르는 동양화이다. 서양화와 구분을 위해 사용하던 동양화라는 명칭을 주체적 입장에서 개칭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983년 개정된 미술교과서에서부터이다. 명칭의 변화에 수반하여 주체적인 문화 역량 창출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2, 30대 청년작가 중심의 수묵화 운동 및 수묵 개념의 변화를 이끌었다. 또 민화·고구려 고분벽화·불화 등에 대한 관심의 고조, 채색화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 용어 사용에 대한 비판도 서양화단을 중심으로 제기된 바 있다.
1960년대 이후, 서구미술과 구별되는 전통적 재료와 양식 및 기법을 따르는 그림에 대해서 중국의 경우는 ‘국화(國畵)’로, 일본의 경우는 ‘일본화(日本畵)’로 부르는 데 반하여 피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동양화(東洋畵)’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등장하였다. 1966년 화가 박노수가 예술원 발행 『한국예술지』의 한국예술 20년 개관에서 ‘신한국화’라는 용어를 제시하였고, 1970년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한국예술지』에 ‘한국화’의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듬해인 1971년 김영기(金永基)는 ‘동양화’를 ‘한국화’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 당국에 건의하였고, 사회 · 문화 각계에 ‘한국화’라는 용어 사용을 요청하였다. 김영기는 1976년 6월 「나의 한국화론과 그 비판 · 해설」이라는 논문에서 한국화/서양화로 분류하거나 회화1/회화2로 구분하자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봉상은 한국인이 그린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 없이 ‘한국화’로 통칭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일제 잔재 청산과 주체성 확립의 조류와 밀착되어 더욱 큰 호응을 받았고, 198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의 공모전인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동양화부’ 대신 ‘한국화부’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1983년부터 매년 열린 현대미술초대전에서도 한국화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아울러 1983년 개정된 새 미술교과서에서도 이 명칭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민간단체에서도 일찌감치 이러한 분위기를 수용하여 1967년 ‘한국화’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화회’가 등장하였고, 1970년을 전후하여 이영복 · 하태진 · 이숙자 등 젊은 세대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단순한 명칭 변경의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미술의 본 얼굴을 되찾고, 이를 주체적으로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한글세대를 주축으로 한국의 전통성과 고유성에 대한 자각과 재인식을 통하여 한국화의 현대화와 세계미술로의 비약 등이 모색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경제 성장과 올림픽 개최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국가위상이 높아지는 것과 발맞추어, 수묵운동(水墨運動)과 채색운동, 그리고 이를 통합하려는 경향 등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아울러 명칭의 변화에 수반하여 주체적인 문화역량을 창출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변화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20, 30대 청년작가 중심의 수묵화 운동, 수묵 개념의 변화, 민화 · 고구려 고분벽화 · 불화 · 무속화 등에 대한 관심의 고조, 채색화의 융성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한국화’와 같은 용어 사용과 태도는 편협한 국가적 지역성 탈피와 탈장르를 지향하는 국제미술의 현대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서양화단을 중심으로 제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