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

몽유도원도 / 안견
몽유도원도 / 안견
회화
개념
채색을 가하지 않고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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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수묵화는 채색을 가하지 않고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중국의 주대 말기부터 시작된 수묵화 기법은, 먹선만을 사용하여 그린 백묘화에서 출발하여 먹의 농담을 이용한 파묵, 먹물이 번져 퍼지게 하는 발묵 기법 등으로 발전했다. 먹색만으로 모든 색채의 효과를 나타내는 수묵화의 주요 소재는 산수·인물·수석·화조·영모·사군자 등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수묵화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중국 수묵화의 주요 양식이 모두 등장한다. 정선에 이르러 한국 산수의 특징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새로운 기법이 창안되는 등 한국 특유의 수묵산수화가 자리잡았다.

정의
채색을 가하지 않고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
개설

수묵화(水墨畵)는 아마도 동양화가 서양화와 다른 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즉 동양의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서는 일찍부터 서양에서 색으로 간주하지 않는 흑과 백을 오색(五色)에 포함시켜 인식했던 점이 수묵화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중국 수묵화의 연원 및 변천

‘수묵’이라는 말은 당나라의 시인 유상(劉商)의 시 구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묵화(墨畵)를 기법상으로 크게 나누면 먹선만을 사용하여 그린 백화(白畵) 또는 백묘화(白描畵)와 먹선에 수운(水暈), 즉 농담(濃淡) 효과를 내기 위해 물에 푼 먹물까지 사용한 정식의 수묵화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는 다시 파묵(破墨)과 발묵(潑墨)의 두 가지 기법으로 나누어진다. 그 발달 단계를 보면 백묘법에 이은 파묵, 그리고 발묵의 순서이다. 수묵화로 그릴 수 있는 화목(畵目)은 산수, 인물, 수석(樹石), 화조(花鳥), 영모(翎毛), 사군자(四君子) 등 다양하다. 특히 북송(北宋)에서 발달한 문인화(文人畵)는 담백하고 고아(高雅)한 수묵화의 특성 때문에 이 기법을 많이 채택하였다.

주대(周代) 말기부터 발달한 중국 회화는 처음에는 필선(筆線) 위주로 시작되었다. 한대(漢代)의 유적들에서 이미 필선의 기본적인 형태, 즉 두께가 일정한 선과 일정하지 않고 비수(肥瘦)의 변화가 있는 선의 두 가지 형태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당대(唐代)까지 필선이란 것이 동양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해 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회화평론서인 육조(六朝)시대 사혁(謝赫)의 『고화품록(古畵品錄)』(약 525년)에 나오는 육법(六法) 중 두 번째가 ‘골법용필(骨法用筆)’인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골(骨)’이란 말은 실제로 상당히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강한 힘 또는 사물의 윤곽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석하면 ‘힘 있는 선을 긋는 데 있어서의 붓의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법에 ‘수류부채(隨類賦彩)’라는 채색에 관한 조항만 포함되어 있을 뿐 먹의 사용에 관한 조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수묵화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문헌인 형호(荊浩)의 『필법기(筆法記)』에는 ‘육요(六要)’, 즉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요소를 기(氣), 운(韻), 사(思), 경(景), 필(筆), 묵(墨)이라고 열거하였다. 이는 6세기 초부터 10세기 초까지 약 4백 년 동안의 중국 회화 발달 과정에서 색채보다 먹 자체를 중요시하게 되는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1) 7세기 말∼8세기 초의 수묵화 :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847년 서(序))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활약한 은중용(殷仲容)이란 화가에 대하여 “그가 묵색(墨色)만으로 오채(五彩), 즉 모든 색채의 효과를 이루었다.”고 하여 7세기 말∼8세기 초에는 수묵화가 그려졌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유작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제작 연대의 하한(下限)이 756년으로 추정되는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가 일본의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은 수묵화의 기원을 8세기 중엽 이전으로 볼 수 있음을 뒷받침해 준다. 즉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나무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데 짙고 옅은 먹물을 가한 것이다.

먹의 농담 기법에 앞서서 채색을 물에 풀어 농담 변화를 나타낸 선염(渲染)이나 금 또는 은가루의 농담 변화를 구사하여 그린 그림들이 실제로 남아 있다. 이 기법이 자연스럽게 수묵의 농담으로 전용(轉用)된 것으로 보인다. 즉 산시성 건현(乾縣)의 당대 분묘벽화(8세기 초)에 채색의 농담을 사용해 바위의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또한 쇼소인 보관품 중에는 은으로 윤곽선을 긋고 농담 변화를 보이는 금 선염으로 표현한 산수화로 장식된 나무상자도 있다. 또 시인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금 · 은으로 그린 낙원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있다.

(2) 8세기 중엽의 수묵화 : 8세기 중엽이 되면 수묵산수화가 제법 자리를 굳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발견된다. 『역대명화기』에는 오도자(吳道子), 왕유(王維) 등의 그림에 관한 기록이 다수 보인다. 오도자는 백묘법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뿐만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감이 넘치는 산수화도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그림은 먹으로 하나하나 자세히(密) 그리지 않고 대강(疎) 그려도, 그 형상이 모두 이루어지고 화의(畵意)가 모두 표현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먹으로 인상파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유추된다. 왕유는 최초로 파묵산수화를 그렸다고 하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역대명화기』에는 또한 그보다 조금 늦게 활약한 장조(張璪)도 파묵산수화를 그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대명화기』 에는 그런 설명이 없지만, 파묵이란 먹의 농담 차이를 여러 단계로 구분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원대(元代) 이간(李衎)의 『죽보상록(竹譜詳錄)』(1299년 序)에서는 ‘파(破)’를 ‘파개(破開)’, 즉 먹에 물을 섞어 엷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원대 황공망(黃公望)의 『사산수결(寫山水訣)』에서는 “담묵(淡墨)으로 파(破)한다.”고 하였으며, 청대(淸代) 심종건(沈宗騫)의 『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1697)에서는 “농묵으로 담묵을 파한다.”고 하여 사물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필선으로 한계 지어진 면에 농담의 선염을 가하였던 사실을 알려준다. 장조의 특이한 기법에 관해서 장언원은 독필(禿筆), 즉 끝이 뭉툭하게 닳아버린 붓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손으로 직접 비단 위에 문지르는 것 등을 언급하였다. 장조 자신은 이에 대하여 “밖으로는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안으로는 마음에서 근원을 얻었다(外師造化 內得心源)”라고 하였다. 즉 수묵산수화가 화가의 내면세계의 자유로운 표출 수단임을 암시하였다.

파묵 기법이 필선을 동반하는 것에 반해 그보다 좀 늦게 등장한 발묵(潑墨) 기법, 즉 ‘먹물을 뿌리는 기법’은 대상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은 채 화면에 뿌려진 먹물이 이루는 형태에 의존하여 사물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기법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역대명화기』, 그리고 840년대의 저술인 주경현(朱景玄)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 등이다. 이들 문헌에서는 주로 8세기 말과 9세기 초에 활약한 화가들의 이례적인 작화(作畵) 태도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즉 왕묵(王墨, 默 또는 洽)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주악에 맞추어 춤추듯이 붓을 움직인 것[舞筆]이나, 또는 상투에 먹을 찍어 휘두르며 손발로 문지르는 등 전례 없이 자유분방한 태도를 언급했다. 또 이영성(李靈省)의 극도로 생략적인 기법, 즉 산수나 나무를 점이나 문지른 자국(抹)만으로 표현하는 것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는 20세기 서양의 행위미술(action painting)을 연상하게 하며, 성당(盛唐)까지의 중국 회화의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분방한 작화태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유교의 도덕 전통에 젖은 귀족 출신 장언원은 발묵은 회화가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반면에 좀 더 새로운 시대감각을 지녔던 주경현은 『당조명화록』에서 이 두 사람과 역시 초탈한 성격의 소유자인 장지화(張志和)를 전통적인 품계(品階), 즉 신(神) · 묘(妙) · 능(能)과 비교되지 않는 일품(逸品)이란 새로운 품계를 설정하여 그 안에 포함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수묵화가 단순한 형사(形似)에서 벗어나 화가의 마음속에 담겨진 자연의 본질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의(寫意)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발묵은 비직업화가들인 선승(禪僧)이나 송대 이후의 문인화가들에 의해서 계속 발달되었다.

지금 당대(唐代) 발묵화의 실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남송 말기의 선승 옥간(玉澗)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아마도 연대가 비교적 이른 진작의 예일 것이다. 그 중 하나인 「산시청람(山市晴嵐)」을 보면, 눈 덮인 산과 마을이 극도로 생략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번져 있는 부정형(不定形)의 먹 점이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짙은 안개에 싸인 겨울 산의 분위기 묘사에 중점을 두었음을 느낄 수 있다.

(3) 9세기 이후의 수묵화 :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수묵화는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기간에 크게 발달하여 오대(五代)와 북송(北宋) 기간에는 중국 회화의 주된 기법으로 대부분의 화목에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화목은 이때에 처음으로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한대(漢代) 이후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던 인물화는 수묵화의 발달과 더불어 북송시대부터는 그 위치를 산수화에 빼앗기게 되었다. 수묵 특유의 기법은 안개 어린 대기(大氣)의 묘사에 의한 공간감의 표현, 여러 가지 방식의 준법(皴法)에 의한 바위나 산 표면의 질감 표현 등 산수 묘사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물론 유가적(儒家的) 또는 도가적(道家的) 산수 찬양 철학의 뒷받침이 있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묵화 기법의 발달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오대와 북송의 산수화 발달은 좀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이때에 화북(華北) 지방과 강남(江南) 지방에서 활약하였던 형호(荊浩), 관동(關同), 이성(李成), 범관(范寬), 곽희(郭熙), 그리고 동원(董源)과 거연(巨然) 등 여러 산수화가들, 그리고 미가산수(米家山水)의 시조가 된 미불(米芾) · 미우인(米友仁) 부자, 남송시대의 대표적인 화원이며 마하파(馬夏派)의 시조가 된 마원(馬遠)과 하규(夏珪) 등은 그 이후 동양 수묵산수화 양식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 산수화가들의 작품에는 담채(淡彩)를 조금 섞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포함시킨다.

수묵화와 관련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화목은 북송시대 문인화의 발달과 더불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사군자(四君子) 그림이다. 주로 윤곽선이 없이 몰골법(沒骨法)으로 많이 그려진 묵죽 · 묵매 · 묵란은 서화일치사상(書畵一致思想)을 가장 잘 대변하는 화목으로 그 뒤 동양화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북송의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은 이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인화가들이다. 그 밖의 특기할 만한 발묵화가로는 남송의 양해(梁楷)와 목계(牧谿), 명대의 서위(徐渭), 청초(淸初)의 석도(石濤) 등이 있다.

한국 수묵화의 연원 및 변천

우리 나라 수묵화의 발달 양상을 더듬어볼 수 있는 문헌기록은 없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인 우현리대묘(遇賢里大墓)의 천장 받침 부분의 산과 나무 묘사에서 색채 선염 기법이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중국에서와 같이 차츰 그 기법이 수묵화로 전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1) 고려시대 : 고려시대부터는 한중(韓中) 양국 간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수묵화, 특히 산수화와 사군자화 기법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화가나 연대가 알려진 확실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교토(京都)의 쇼코쿠지(相國寺)에 소장되어 있는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를 고려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역시 일본에 있는 몇 점의 수묵산수화도 고려시대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수묵산수화의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기준작이 없는 실정이므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2) 조선시대 : 조선 초기의 화원(畵員) 안견(安堅)이 1447년(세종 29)에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연대와 화가를 모두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수묵산수화이다. 이 그림은 북송의 이곽파(李郭派 : 중국 북송시대 화가인 이성(李成)과 곽희(郭熙)의 산수화 양식을 따랐던 화가들의 총칭) 양식이 명초(明初)까지 내려오면서 변천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조선 초기와 중기에 유행한 이른바 ‘안견파’ 산수화의 모체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는 또한 강희안(姜希顔)「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에서 볼 수 있는 명대 초기에 형성된 절파(浙派 : 명대 저장성(浙江省) 출신의 대진(戴進)을 시조로 하는 직업화가의 일파) 양식, 이상좌(李上佐) 작으로 전칭되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의 마하파(馬夏派 : 중국남송의 화원 마원(馬遠)과 하규(夏)의 산수화 양식을 따르던 화가들의 총칭) 양식, 그리고 최숙창(崔叔昌)으로 전칭된 산수화의 미가양식(米家樣式: 중국북송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가 창시한 산수화 양식) 등 중국 수묵산수화의 주요 양식이 모두 등장하였다.

조선시대 수묵산수화의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는 것은 정선(鄭敾)을 위시한 진경산수(眞景山水) 화가들이 활약한 18세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에는 기존의 중국 산수화 기법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한국 산수의 특징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한 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시대 문인들도 수묵산수화, 사군자, 묵화, 묵포도 등 다양한 수묵화를 남겼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조선 중기 이정(李霆)의 묵죽, 어몽룡(魚夢龍)의 묵매, 이계호(李繼祜)의 묵포도, 후기에 활약한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의 산수화가 있다.

참고문헌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
『한국회화사』(안휘준, 일지사, 1980)
「당대수묵화의 전개」(권덕주, 『중국미술사상에 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82)
「白描法から水墨畫への展開」(米澤嘉圃, 『水墨美術大系』1, 東京:講談社, 1978)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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