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이다. 자는 여승(汝承), 호는 휴당(休堂) · 휴휴당(休休堂) · 휴옹(休翁)이다. 아버지는 이보철(李普哲), 어머니는 김진중(金鎭重)의 딸 광산 김씨(光山 金氏)이다. 아버지의 6촌인 이보택(李普澤)의 양자로 들어갔다.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 元氏)이며,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거하여 서호(西湖) 홍식(洪湜)에게 그림을 배운 조선 중기 화가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이계호의 한글 『연행록(燕行錄)』이 발굴되면서 조선 후기 인물로 밝혀졌다.
25세 때인 1779년에 무록관(無祿官)인 통례원(通禮院) 가인의(假引儀)가 되었다. 1793~1794년에는 집안 조카인 이재학(李在學)의 군관으로 사행을 다녀왔다. 1798년 진주의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을 역임했고, 이후 공주 이인(利仁)에서 찰방 생활을 하다가 68세 때인 1822년에 통례원 일을 맡았다.
40세 이전에 포도 그림으로 화명을 얻었으며, 1823년 이후부터 몰년까지 기년이 있는 대형 병풍을 제작하며 활발한 작화 활동을 했다. 72세에 그린 병풍에, 낙상하여 오른쪽 어깨가 부러진 지 1년이 지나도록 글씨를 쓰지 못하다가 종이 여덟 폭이 생겨 아픈 것을 참고 포도를 그렸다고 하여 노년까지 예술적 열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절지형 단폭, 절지형 연폭, 전수식(全樹式) 병풍을 두루 제작했다. 포도 줄기의 동세를 강조했으며, 포도즙을 먹 또는 다른 안료와 섞어 포도알의 농담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농묵의 갈필을 속도감 있게 사용한 서예적인 필치와 포도 넝쿨이 원형을 이루며 물결치듯 뻗어나가는 파격적인 구도는 이계호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이후 최석환(崔奭煥)을 비롯한 전라북도 지역 포도 그림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1793년 10월부터 1794년 2월까지의 동지사행을 기록한 한글 『연행록』을 저술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포도도」, 「묵포도도」, 「포도도」 8폭 병풍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