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이 불교 개혁을 위하여 저술한 책이다. 전 17장 중 1∼4장까지는 불교의 가르침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입각하였음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승려 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의 강화, 불교 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등 갖가지 문제에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불교 유신론은 당시의 정치적 외적 정세와 불교 내부의 완고한 보수성 때문에 무위로 끝났다. 하지만 당시로서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은 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일대혁신을 단행하여야 한다는 의도 아래 일본의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섭취하고 돌아온 뒤, 1909년 집필을 시작하여 백담사(百潭寺)에서 탈고하였다. 1910년에 작성한 서문을 붙여서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佛敎書館)에서 연활자본(鉛活字本)으로 처음 간행하였다. 그런가 하면 1914년 임선종중앙포교당(臨禪宗中央布敎堂)에서 발행한 것도 있었다. 전 17장 중 1∼4장까지는 저자가 이해하고 있던 불교관을 토대로 뒤에서 전개될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밝힌 부분이다.
그는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예견하고, ‘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과 불교의 가르침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입각하여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의 강화, 불교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승려의 혼인문제, 주지의 선거,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논지는 한국불교의 모든 분야에 걸친 비종교적 · 비시대적 · 비사회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하여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여야하며, 이렇게 하여 불교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고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발휘하여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1장 서론에서는 당시 정치 · 경제 · 학술 · 사회 전분야에 유신의 기운이 팽배하여 있는데 오직 조선불교만이 유신을 외면하고 있음을 혹평하고, 그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유신론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동시에 이를 승려 동지들에게 알려 조금이라도 취할 점이 있어 유신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제2장 ‘논불교지성질(論佛敎之性質)’에서는 불교의 유신을 논함에는 먼저 불교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고, 이것을 현재와 미래의 상황에 비추어 검토하여야 한다고 밝힌 뒤, 불교의 종교적인 성질과 철학적인 성질의 두 대목으로 분류하여 논술하였다. 제3장 ‘논불교지주의(論佛敎之主義)’에서는 불교의 주의를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의 둘로 나누어 불교의 특징을 밝혔다.
제4장 ‘논불교지유신의선파괴(論佛敎之維新宜先破壞)’에서는 유신은 파괴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는 과격한 혁신적 논리가 실려 있다. 파괴라는 것은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구습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유신에 있어 가장 먼저 하여야 할 바는 파괴라고 단언하였다.
그는 이 이론을 의사와 환자의 비유를 들면서 전개하고, 조선불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폐단이 극치에 달하였고, 이 폐단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폐단을 파괴하기를 기피하고 피상적인 개량만을 추구한다면 그 폐단이 제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조선불교유신에 뜻을 둔 사람은 유신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파괴하지 않음을 걱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제5장 ‘논승려지교육(論僧侶之敎育)’에서는 승려의 교육을 논하면서 폐쇄적인 독단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한국승려의 타락이 자유로운 탐구자세의 결핍, 안목의 왜소, 식견의 편협함에 있다고 본 그는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하여 교육의 타당성을 주장, 승려교육제도를 ① 전문학의 기초학문인 보통학, ② 자연사범(自然師範) · 인사사범(人事師範)의 사범학, ③ 지식을 교환하고 학문을 교류함으로써 사리를 밝히는 외국유학 등을 제시하였다.
제6장 ‘논참선(論參禪)’에서는 당시 승려들의 참선이 외형적으로는 매우 성황을 이루었으나 그 내실을 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참선의 유신책으로 큰 규모의 선학관(禪學館)을 만들어 선의 이치에 밝은 몇 사람의 스승을 모시고 일정한 시험을 거친 뒤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수용, 일정한 시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일상생활과 자연 속에서의 참선을 말하고 있다.
제7장 ‘논폐염불당(論廢念佛堂)’에서는, 그 시대의 염불풍토를 비판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나에게 성불할만한 도가 있으면 스스로 성불하여 정토에 가게 될 것인데, 먼 다른 곳에 있는 부처에게 애걸하는 거짓염불을 폐지할 것과, 부처님의 마음을 염(念)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염하며 부처님의 행(行)을 염하기를 끊임없이 닦는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제8장 ‘논포교(論布敎)’에서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낙후된 상태에 있다고 보았고, 그 원인을 세력의 부진과 포교의 부재에 두었다. 재래불교의 비포교성을 비판하고 불교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포교의 필요가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제9장 ‘논사원위치(論寺院位置)’에서는 조선의 사원이 한결같이 산중에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의 사원이 평화롭고 이상적인 승가(僧伽) 본연의 화합중(和合衆)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갈등과 분열에 놓여 있음을 알고, 사원이 산중에 있기 때문에 진보사상 · 모험사상 · 구세사상 및 경쟁하는 사상이 없으며, 교육 · 포교 · 교섭 · 통신 · 단체활동 · 재정 등의 문제에 불리한 점이 많음을 지적, 불교의 구세적이요, 포교적인 사명을 위하여 도시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10장 ‘논불교숭배지소회(論佛敎崇拜之塑繪)’에서는, 사원 안에 봉안된 각종의 소상과 회화[塑繪]를 철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거짓 모습으로 된 대상을 만들어 중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소회가 발생한 원인인데, 당시 불교계에는 수많은 소회를 받들면서 복을 비는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에 소회를 간략하게 하여 혼란과 번잡함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서 석가모니 한 분만을 모셔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제11장 ‘논불가지각양의식(論佛家之各樣儀式)’에서는 불교의 모든 의식절차를 남김없이 비난하고, 의식의 철저한 개혁과 폐지를 주장하였다. 전래하는 모든 의식절차가 번잡하고 다단하니 과감하게 간소화 해야 한다는 것으로, 예불은 하루 한 번씩 삼정례(三頂禮)만 하며 복을 빌어 망령되이 제사지내는 재공양(齋供養) 등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였다.
제12장 ‘논승려지극복인권필자생화시(論僧侶之克復人權必自生和始)’는 승려가 인권을 회복함은 반드시 스스로 생산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3장 ‘논불교지전도가 관어승니혐취여부자(論佛敎之前道가關於僧尼嫌娶與否者)’에서는 조선불교를 부흥시키는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로 승려의 가취문제를 들고 있다. 혼인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나, 이는 방편으로 계율을 설정하여 제한한 데 불과한 것일 뿐 승려가 독신생활을 계속하면, ① 윤리에 해롭고, ② 인구가 줄어 국가적으로 손실이며, ③ 포교에 해롭고, ④ 풍속에 해로우므로 반드시 승려의 혼인은 자유에 일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4장 ‘논사원주직선거법(論寺院住職選擧法)’에서는 그때까지의 사원 주지가 선거를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한 번씩 맡는 윤번주지, 권리가 있는 자에게 의뢰하는 의뢰주지, 무력으로 얻는 무단주지의 세 가지 형태로 주지직을 맡아왔으나, 한 사찰의 성쇠가 주지에 달렸으니 선거법을 강구하여 주지를 뽑고, 또 월급을 주어 사원행정을 합리적으로 책임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15장 ‘논승려지단체(論僧侶之團體)’에서는, 조선승려의 대부분이 독선적 이기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서로의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 이들이 봉사의 정신으로 단결하여야만 불교유신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제16장 ‘논사원통할(論寺院統轄)’에서는, 승려뿐만 아니라 사원도 사무절차나 의식에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사찰과 사람마다 차이가 심하여 불화가 생기고 뭉쳐지지 않으며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보았다. 조선불교를 살리기 위하여서는 조리있는 절차와 의식의 기준이 마련되고, 전 불교사원과 그 재산까지도 일률적으로 통괄하는 조직과 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17장 결론에서는 이 논문이 자기 내면의 충동을 못 이겨 저절로 말한 것으로 조금도 사심이 섞이지 않으며, 마음 그대로 말한 것이요 의무 그대로 행한 것일 뿐이니 옳고 그르고 행하고 못하는 것은 자기의 알 바가 아니라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불교유신론은 당시의 정치적 외적 정세와 불교 내부의 완고한 보수성 때문에 무위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이 글은 ① 1910년 당시 조선불교의 전반에 걸쳐 다각적인 관찰과 비판을 가하였다는 점, ② 전체 논문이 이론정연하고 체계가 짜여 있다는 점, ③ 불교의 장래를 누구보다도 아끼는 종교적 정열에서 솟아나온 산 글이라는 점, ④ 당시로서는 개화된 문장체인 국한문병용을 택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가장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불교의 병폐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을 볼 때 이 유신론은 아직 그 생명이 살아 있다. 그러나 유신론의 논조가 ① 극히 외형적 · 피상적으로만 승단의 병폐를 지적하였다는 점, ② 따라서 불교교리 · 사상의 근대적 해석이나 주석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 ③ 급진적 유신에 조급하여 종교교단의 근본원칙이 되는 계율의 해석과 개혁을 소홀히 다루었다는 점, ④ 조선불교의 병폐가 호국을 가장한 승단이 역대왕조와 야합한 사실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⑤ 도리어 승려의 독신생활을 왕권이나 일제 통감부의 무력에 의하여 막으려고 하였다는 점 등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