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서양에서 철학 곧 필로소피아는 필로스(사랑함)와 소피아(지혜)라는 두 말의 합성어로, 그대로 번역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지혜의 내용이 매우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세계관, 인식론, 윤리학 등을 포함한다. 한국 철학은 주로 유교·불교 등 종교사상에 기반을 두거나 외국 철학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관념적 추상성이나 고증적 번쇄성보다는 인간 심성의 내면적 인식이나 신념적 집약화를 추구해 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철학이란 용어는 오늘날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철학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한 가지 개념으로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갖는 포괄성과 다의성 때문에 철학 앞에는 관념론적 철학 · 경험론적 철학 · 실존론적 철학 · 과학철학 내지 언어철학 등 각 철학의 주제와 특징에 따른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또 지역적으로는 서양철학 · 동양철학 및 한국철학이라는 명칭이 함께 쓰이기도 한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문이 이와 같이 다양한 주제와 광범위한 영역을 갖게 된 것은 이 학문이 오랜 역사를 통해 발달해 온 데다가, 철학을 행하는 방식이 철학의 개념을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생겨났고, 초기에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뜻한다. 필로소피아는 필로스(philos, 사랑함)와 소피아(sophia, 지혜)라는 두 말을 합성한 것이다. 필로소피아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 또는 ‘애지(愛智)’를 뜻한다.
그러나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던 당시는 아직 철학이라는 말과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철학자라기 보다는 현자로 불렸고, 자신들의 활동을 철학이 아니라 역사(historie)로 규정하였다. 후대의 가필로 여겨지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철학자(philosophus)라고 소개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로 전해진다.
명사형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이전인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폴리스 공동체에서는 시민의 “정치적 덕”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인 활동 및 지적인 교육에 종사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지혜 혹은 지식을 사랑하다”(philosophieren)라는 뜻의 “철학하다”라는 동사형 및 “지식을 사랑하는” 뜻의 “철학적”이라는 형용사가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이후 명사형으로서의 철학은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등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크세노폰 · 이소크라테스 · 플라톤 등의 글에서도 이러한 용례가 발견된다. 초기의 철학이라는 용어는 폴리스 시민의 “교육”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이 상품처럼 지식을 돈을 받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파는 행위도 일종의 철학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은 철학을 단순한 “지식의 전달” 내지 “지식의 과시”로 보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철학을 참다운 앎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지식의 과시”보다는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해 대화를 통한 검토와 반박의 과정을 중요시했다.
대화를 통한 검토와 반박의 과정에 의해서 참다운 앎을 획득해 가는 자기 비판적 탐구정신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이미 삶의 태도와 관련되고 있었다. 대화를 통해서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판단해서 나온 참다운 앎에 따른 행위가 바로 자율적이고 이성에 근거한 윤리로 정초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참다운 “지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은 ‘이론적 지식’ 뿐만 아니라 선악의 인식을 내용으로 삼으며, 비판적 자기 검토를 통해 올바른 실천적 행위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지행합일”의 성격을 띠게 된다.
앎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출발했던 “철학”의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인간 바깥의 자연세계 및 우주에 대한 이론적 앎, 그리고 인간의 올바른 행위를 다루는 실천적 앎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은 서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은 아니어서 이 양자는 철학의 용어로 통합되었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초창기에 “지혜에 대한 사랑 내지 추구”로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자기 비판을 통한 참다운 앎의 추구와 그 앎에 따른 실천적 행위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용어’가 원래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안다고 해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단적인 대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철학은 ‘개별 학문’이 추구하는 현실의 한 영역이나 단면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체성과 근원성을 문제로 삼는다. 또한 무전제성에서 출발한다는 근본적 특성이 있다. 그러기에 철학의 방법과 대상은 미리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시대마다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전체적이고도 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철학의 방법과 대상을 새롭게 규정하며, 그 시대가 제기한 근원적 과제에 답하였다. 철학사는 각 철학자들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철학함을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에,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몇 가지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지역이면서 동시에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규정지은 서양철학의 요람이다.
칸트(I. Kant)는 그리스에서 철학이 탄생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리스라는 경탄할 만한 민족이 희망봉(希望峰)을 도는 항로를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고방법의 혁명을 가져왔다.”
서기전 7세기경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에 살았던 최초의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만물의 원인과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철학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살던 지역은 중계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이집트, 페르시아 등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서로 교차하고 있었고, 또한 물질적 풍요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그 때까지 지배했던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물질적 풍요로 인한 넉넉한 생활은 사물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schole-]나 “한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의 근원(arche-)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 근원은 모든 사물을 이루는 원재료이자 사물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자들은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인 근본법칙[logos]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흔히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학파, 엘레아학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쏘스], 헤라클레이토스, 다원론자인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로 언급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의 원질(原質, arche-)에 대해 각각 다른 해답을 찾았다. 탈레스는 물[水],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무한정자(無限定者)인 아페이론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불[火], 피타고라스는 수(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일자(一者),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흙 · 물 · 불 · 공기의 4원소, 아낙사고라스는 많은 씨앗[種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원자 등을 각기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지적하였듯이, 탈레스를 위시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자연(physis)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적으로 자연이 스스로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는 물활론적 입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해답보다는 그들이 품었던 세계에 대한 물음과 합리적 설명 방식의 시도에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원질에 대한 추구는 “신화에서 이성으로” 향한 새로운 애지 활동의 성과였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정치 · 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아테네 시민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졌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세련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가를 받고 웅변술을 가르치거나 교육을 해주는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지금은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지만, 원래 소피스트들은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철학사에 기여한 공로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 탐구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전승된 도덕관념을 의문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윤리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언어와 인간의 사유를 철학적 문제로 다루었다는 점도 소피스트의 공로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활동이 없이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고전기를 생각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한 이후에는 철학의 관심은 인간영혼, 선(agathon)과 덕(arete)과 같은 인간의 본성과 윤리적 문제로 더욱 집중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모든 성과들을 자신의 철학체계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창조했다. 플라톤 철학의 중심은 이념을 뜻하는 이데아론이다.
이념은 “비물질적이고, 영원불변의 본질”로 설명되며, 이념의 세계는 가시적 세계와 구분된다. 가시적 세계는 지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이념의 세계는 모든 직관을 넘어 순수이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념 중에서도 ‘선의 이념’을 철학적 문제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에게 선이란 존재의 목적과 원천을 묻는 윤리학적 의미를 넘어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태양이 모든 것들에게 가시성과 생명과 성장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자들은 선의 이념에 의해 존재하며, 전체 세계에 ‘질서’와 ‘척도’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 선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영역을 “체계적”으로 건축하고 “학문적”으로 정초하려 했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이념은 이념에 참여한 사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원론에 기초한 플라톤의 이념론과 결별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이 사물 그 자체”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참다운 실재는 바로 개개의 특수한 사물이라고 보고 이것을 실체[ousia]라고 하였다. 이데아에 해당하는 보편으로서의 본질은 결코 특수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 속에 그것들의 공통적 성질로서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실체는 그것을 형성하는 소재로서의 질료(質料, hyle)와 이 질료를 일정한 종류의 사물로 현실화시키는 원리로서의 형상(形狀, eidos)과의 결합체라고 보았다.
질료는 일정한 실체로 나타날 가능성을 가진 가능태(可能態, dynamis)이며, 이 가능태가 형상을 실현한 것을 현실태(現實態, energi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나아가는 이 운동원리를 엔텔레키(Entelechi 완전성을 향한 활동원리)라고 불렀다. 모든 사물의 본질[ousia]은 그 본질의 현실적인 전개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를 자신의 형이상학의 중심적 입장으로 삼아, 세계[우주]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체 자연이 연쇄적인 계열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이 구조에 있어 가장 낮은 영역인 순수질료[제일질료]로부터 단계적으로 질료가 형상을 실현시켜가면서 가장 높은 영역인 순수형상으로 상승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른바 제일철학(第一哲學)의 주제로 본 제일원리로서의 순수형상은 전혀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순수형상이기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는 데서 ‘부동의 원동자(原動者)’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만물이 움직여가는 궁극의 목적인 동시에 모든 생성의 궁극원인으로서의 완전자로 규정되는 순수정신 또는 신이다.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정복은 동방의 여러 문화를 그리스 본토로 전래하게 하여 ‘헬레니즘(Hellenisim)'[^2’이라고 불리는 혼합문화를 형성시켰다. 이 문화는 후에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갈 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 때의 철학은 이미 도시국가(polis)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국가를 바탕으로 한 세계시민적 철학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은 스토아학파(stoics)의 금욕주의,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의 쾌락주의, 그리고 회의학파(懷疑學派, sceptics) 등이다.
스토아학파는 신적(神的)인 세계법칙인 로고스(logos)가 세계를 형성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은 이 로고스의 분유(分有)로 있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우주적 이법인 로고스를 따라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생활을 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성에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으로 모든 쾌락과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욕을 통한 충동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적 평정(平靜), 부동심(不動心)의 상태를 무감동(無感動, apatheia)이라 부르고, 이 경지를 인간이 목적하는 참다운 행복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자(賢者, sophos)로 보았다. 여기서 철학은 자신의 이성에 기초해 필연적 세계이성에 대한 통찰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초기 스토아학파로는 스토아철학의 정초자라 할 수 있는 크리톤의 제논과 크리시포스를 들 수 있다. 중기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철학을 로마로 가져왔던 파나이티오스와 초기의 스토아학파의 윤리적 엄격성을 고수하려 했던 포세이도니오스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후기 스토아학파는 로마 시대의 세네카(Seneca), 에픽테토스(Epictetos) · 아우렐리우스(Aurelius)황제 등으로 대표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다르게 인간을 보편적인 세계법칙으로서의 로고스와의 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고립적 · 자연적 존재로서 파악하였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쾌락과 고통을 모든 실천의 기준으로 보고, 쾌락은 선이며 고통은 악으로 여긴다.
에피쿠로스(Epicouros)는 철학을 개인의 쾌락(hedone-), 즉 행복을 얻는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쾌락을 ‘마음의 평정(平靜, ataraxia)’으로 보았고, 이 이상적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현자라고 하였다.
퓌론(Pyrrhon)에 의해 창시된 회의학파는 위의 두 학파를 모두 독단론이라고 배격하고, 일체의 이론을 단념함으써 ‘무감동’이나 ‘마음의 평정’을 누리려고 하였다.
외계의 사물은 단지 불확실한 지식을 줄 뿐이며, 사물의 진상(眞相)이 아닌 데서 사물에 집착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고 보고, 불확실한 지식밖에 주지 못하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판단중지(判斷中止, epoche-)에 의해 무감동이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일의 선악과 진위(眞僞)를 구별하려면 반드시 타인과 대립하게 되어 결국 마음의 평정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헬레니즘시대의 철학은 불안한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윤리 중심의 처세철학의 경향이 짙었다.
이에 반해 로마제국의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초월적인 신의 힘에 의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경향이 농후해진다. 이 시대의 대표적 철학은 플로티노스(Plotinos)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 찾을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것이 일자[hen]로부터 유출[Emanatio]되었다고 한다. 일자는 스스로의 충만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방출해 낸다. 이렇게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단계는 정신, 영혼, 물질의 순서로 진행되고, 일자로부터 멀어질수록 통일성과 완전성의 정도가 떨어진다.
정신은 만물의 영원한 원형상인 일자를 관조할 수 있는 영역이며, 영혼은 우주와 물질계의 개별적 사물들에 스며들어 생기와 조화를 부여한다. 모든 만물은 일자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상인 일자를 지향한다. 인간의 개별적 영혼은 물질과 결합해 있기 때문에 일자의 영원한 원형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을 방해하거나 흐리게 한다. 따라서 일자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정화”가 필요하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철학은 영혼이 물체의 그림자 세계를 극복하고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일자를 직접 관조할 수 있는 “망아”(ekstasis)의 경지에서 최고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러한 면모를 지닌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신 중심의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려 했던 중세 기독교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중세철학의 특징은 기독교와 철학의 결합에 있다. 중세철학의 시작은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유스티누스 황제에 의해 폐교된 529년으로 잡는다.
초창기 중세철학을 지배했던 기본적 주제는 “믿음”과 “앎”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기독교를 그리스철학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중세 기독교철학에 있어서 “믿음”과 “앎”의 관계는 필연적인 문제였다.
교부철학 중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철학적 체계화를 시도한 그노시스(Gnosis)학파의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신앙에 대한 지식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다같이 이성주의(理性主義)편에 섰다.
클레멘스는 하느님이 철학을 원하며, 철학의 이성적 사용은 구원을 가져온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호교파(護敎派)측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철학이란 이교도의 것이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말로 신앙을 강조하였다.
철학은 교회의 신앙과 서로 대립하여 논란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교리의 체계화와 변신론의 필요를 위해 기독교 안으로 수용되어 갔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황제에 의해 로마제국 내에서 하나의 종교로 공인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신인론 및 원죄론이 공식적인 교리로서 결정되기에 이른다.
교부철학의 대표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St.)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인간의 ‘믿음’은 자신의 인식 가능성을 전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명제화했다. “인식하기 위해서 믿으라. 그리고 믿기 위해서 인식하라.”(Crede ut intelligas, intellige ut credas).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인식의 확실성을 자기 존재의 확실성에서 찾았다. “내가 속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enim fallor, sum)라는 말로서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의식함으로써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데카르트와 달리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통해 자기 안에 거처하는 진리, 즉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리는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대략 정비되었고, 그 뒤 철학의 역할은 그 교리를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 논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할은 대개 교회 소속 학교(schola)나 수도회 소속 학원(schola)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 강론한 학자나 교사들에 의해서 수행되었고 이에 스콜라철학이 정립되었다.
선구자는 에리우게나(Eriugena)였다. 그는 “진정한 종교는 진정한 철학이요, 진정한 철학은 진정한 종교이다.”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의 유출설과 기독교의 창조설을 결합시키고자 했고, 만물은 신으로부터 전개되고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논증하였다.
이성은 계시의 의미를 해명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으며, 교부들의 “권위”인 교리는 받아들여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성에 맞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St.)는 “참된 이성”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신앙의 진리로 이끈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 내용을 교부의 권위나 성경의 도움 없이도 순전히 이성을 근거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프로스로기온』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이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스콜라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T.)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그는 철학의 영역은 이성에 속하고 신학은 신의 계시에 근거한다고 하여 이성과 신앙의 영역을 엄밀히 구별하였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은 다같이 진리로서의 신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이른바 신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 원인은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이며, 모든 사물의 본성은 그것의 존재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질서의 계열이라고 하면서, 만물이 갖고 있는 상대적 완전성의 차이는 단계적으로 올라가서 최고의 완전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필연적 존재로서 논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성적이고도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며, ‘자연의 빛’인 이성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을 규명하고 지식을 획득하는데 반해서 삼위일체(三位一體)나 신의 육화(肉化)와 같은 신앙의 오묘성은 신의 ‘은총의 빛’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그는 경험적인 자연과 그것을 넘어선 초자연의 독자성을 구분하면서도 “은총은 자연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킨다.”는 관점에서 큰 조화를 도모하였다.
후기 스콜라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보편논쟁(普遍論爭)이었다. ‘보편’은 ‘개체’에 앞서 존재한다는 견해가 스콜라철학의 정통론이었다. 가톨릭교회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개개의 신자들 내지는 개개의 교회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그것을 초월하는 보편적 실재로서의 존재이며, 지상에 있는 신의 나라라였다.
이에 대해 요하네스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J.)는 보편자는 오직 “말”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대변한다. 오캄(Occam,W.) 역시 “보편은 단순한 개념에 불과하며 단지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여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입장을 대표한다. 그는 보편이란 단지 개체를 대표하는 추상적 명사에 지나지 않고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은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보편적인 신의 존재나 성질에 관해서는 엄밀한 의미의 학문이 성립될 수 없으며, 다만 믿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보편을 대변하는 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독자적인 자기 주장을 하게 된 당시의 시대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오캄은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등으로 연결되는 학파의 “고대의 길”(via antiqua)과 반대로 형성된 “근대의 길”(via moderna)을 형성한다. 유명론에 의해서 지식과 신앙, 철학과 종교가 점차로 분리되고, ‘개인’과 ‘경험’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근대 초기에 유럽사회는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발달’로 문화사적 격변을 겪는다. 화약은 전쟁기술의 변화를 초래해서 기사 신분의 위상을 변화시켰다. 나침반에 의한 항해술의 발달은 유럽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밖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소수에 국한되어 있었던 지식과 글을 널리 빠르게 전파함으로써 지식층을 확대시켰다.
이제 폐쇄적이고도 배타적인 중세 교회의 지배로부터 역동적인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되었고, 유럽의 학문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인문주의자들에 의한 개인주의적 ‘인간의 재발견’이 강조되고,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등에 의해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철학 역시 근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독단적 진리나 어떠한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안 것만을 진리로 믿는 경향을 띠게 된다. 경험 또는 이성을 통한 지식과 사상만이 참다운 진리로 간주되었다.
근대철학은 프랑스 · 네덜란드 및 뒤늦게 발달한 독일 등 유럽대륙에서 발전한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영국에서 발전한 경험론으로 대표된다.
합리론의 철학은 감각적 인식이 아닌 순수 이성만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띤다. 근대 합리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데카르트(Descartes, R.)이다.
그는 철학도 수학처럼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하고도 명증적인 인식(certe et evidenter cognoscere)으로부터 추론가능한 명제를 연역(演繹)해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장 확실한 인식의 출발점인 아르키메데스점을 찾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는 자아의 존재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원리이자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원리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확실한 현실의 구조를 밝혀 내려 했다.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만이 진리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기존의 주장이나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파악된 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주장이 도출된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이성에 부여하는 결정적인 역할 때문에 그의 철학과 그를 추종하는 철학에 “합리론”(Rationalis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경험에 근거하여 외계의 개별적 사실을 관찰하고, 개별적인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하여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하였다. 합리론이 선천적 이성을 중심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중요시한 데 비해서, 경험론은 후천적 경험을 존중하고 관찰과 귀납적 방법을 중요시한다.
경험론의 선구로서 영국의 베이컨(Bacon, F.)은 종래의 학문을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학문의 혁신을 도모했다. 학문의 목적은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유명한 명제는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앎을 뜻하고 이 앎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식을 방해하는 선입견이나 편견, 즉 우상(偶像, idola)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가 네 종류로 분류한 우상은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인간이라는 유적 본성에서 나오는 편견.),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개인이 가진 성벽, 교육, 습과 경향 등에서 나오는 편견.), 시장의 우상(idola fori: 언어로 인한 오해와 혼란에서 나오는 편견),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 잘못된 원칙이나 학설에 의한 편견)이다.
그는 학문 연구는 먼저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사실이 수집, 정리되고, 다음에 그 사실의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방법이 바로 귀납법(歸納法, induction)으로 자연 인식의 참된 방법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학문을 인간의 정신능력인 기억 · 상상 · 이성 세 가지에 상응하는 역사 · 문학 · 철학으로 구분하였다. 그에게 있어 철학은 최상위의 학문이며 모든 학문에 공통되는 기초를 대상으로 삼는 제일철학(Prima Philosophia)를 의미한다.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경험적 인식론을 창시한 학자는 로크(Locke,J.)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본유관념을 부정하면서 생득적인 관념이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모든 관념들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요, 우리의 마음은 원래 백지(白紙, tabula rasa)와 같은 것으로, 태어날 때 아무런 내용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로크는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 진 관념들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를 지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에 있어서는 “순수이성”으로부터 나오는 “필연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중요하다.
흄(Hume D.)은 경험론의 논지를 더욱 철저화해서 회의주의에까지 이르렀다. 흄은 단순관념의 결합이 유사(resemblance), 시공의 인접(contiquity in time and space),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의 세 가지 연상법칙에 따라 이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도 사물에 속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A와 B의 연계를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어진 습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인과법칙에 기초하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객관성이나 확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었다. 더욱이 사실에 관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사실로부터의 추리도 아닌 형이상학은 필연성은 고사하고 개연성조차 없는 공허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합리론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선천적 지식체계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경험의 직접성을 외면한 데서 공허한 독단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경험론 또한 감각 내지 주관적 경험에 기초한 인식의 객관적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했으면서도 흄에 이르러 회의론에 이르고, 자연과학의 확실성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 극단의 철학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필연적 과제이었다.
이러한 과업은 칸트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그는 흄에 의해 ‘독단의 꿈’을 깼다고 한다. 그것은 종래의 모든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흄의 회의론에 반대하여 수학과 자연과학이 참된 지식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근거를 밝히려고 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참된 지식이란 객관적 필연성 내지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선천적 종합판단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칸트철학의 중심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지식 또는 인식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하거니와, 그 내용이 된 소재(素材)는 감성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식은 소재만으로써 이루어지지 않고, 소재를 가지고 인식을 구성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소재가 경험적이고 후천적(a posteriori)인데 반하여 형식은 인식 주관에 선천적으로 갖추어 있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이다. 이 선천적 직관형식에 의하여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소재는 표상으로 얻어진다.
표상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잡다(雜多)에 불과한 것으로 아직 인식이 될 수 없다.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사유능력인 오성(悟性)에 의하여 또 하나의 선천적인 형식인 오성형식 내지 사유형식이 따라야 한다. 이 형식을 칸트는 순수오성개념 또는 범주(範疇)라 하여 이것을 12개로 나누었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감성이 직관형식을 통하여 받아들인 잡다한 소재를 오성이 사유형식에 의하여 종합, 통일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때 비록 소재는 경험적 ·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졌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종합, 통일하는 형식들은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인식은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이라고 하여 인식의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해명하였다.
칸트는 인식이 주관의 능동적 활동에 의하여 구성된다고 보았으므로 이를 구성설(構成說)이라 하고, 이와 같은 인식론을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고 불렀다. 칸트는 감성을 촉발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구분하였고 물자체의 세계는 인식될 수 없다고 하여, 이른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에 섰다. 칸트가 현상계와 물자체를 다같이 인정함으로써 남겨 놓은 이원론은 이후 독일관념론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피히테(Fichte,J.G.)는 칸트의 ‘물자체’의 설정이 수미일관하지 못하다고 보고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이성에 대립하는 인식대상인 비아를 절대적 자아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비아로서의 자연을 자아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지나치게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 치우쳤다.
쉘링(Schelling,F.W.von)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비판하고 동일성의 철학(Identit○tsphilosophie)에서 절대자(絶對者, das Absolute)를 상정하였다. 이 절대자는 자아와 비아, 혹은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의 구별 이전의 대립적 차별이 없는 ‘절대적 동일성’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완전한 무차별적 동일성에 기초한 쉘링의 ‘절대자’는, 절대자로부터 현상세계에 나타나는 유한자의 차별상을 해명하기 어려운 난점을 안고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머리말에서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쉘링의 절대자를 “모든 소를 까맣게 보이게 하는 밤”으로 비판했다. 헤겔(Hegel,G.W.F.)은 쉘링철학의 ‘절대자’ 개념의 한계를 의식하고 유한자의 피안에 있는 절대자는 참다운 절대자가 아니요, 유한자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이 유한자와 대립되는 무한자까지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절대자이며, 이것은 모든 차별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구체적인 보편이라고 하였다. 모든 차별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절대자를 파악하는 것이 헤겔철학의 본질을 이룬다.
헤겔은 절대자를 이성활동으로서의 로고스(Logos) 혹은 이념(理念, Idee)이라 하고, 세계를 이 이념의 발전으로 보았다. 그는 이념은 스스로 발전하는 이성적 ·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세계이성(世界理性, Weltvernunft) 또는 절대정신(der absolute Geist)이라고 불렀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은 처음에 자연 속에서 소외되어 부자유한 상태에 있다가 역사를 거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이러한 정신의 발전에 따라 진행되며, 역사는 “일인의 자유”로부터 “만인의 자유”로 향한 필연적 발전을 한다.
헤겔이 역사철학을 통해 입증하고자 한 이성의 자기실현은 자연적 폭력과 낡고 불합리한 정치체제로부터 인간의 해방과 자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철학이란 역사와 자연 속에서 이성의 필연성을 통찰하는 것이었다.
현대철학은 대체로 19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갈래의 철학을 통칭한다. 19세기 철학은 한편으로는 헤겔의 거대한 사변적 체계에 대한 반발의 양상을 띠며,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산업혁명’의 폭발적 발전에 자극과 도전을 받는다.
19세기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주요한 철학들로는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r Materialismus) · 생철학(生哲學, Lebensphilosophie) · 실존철학(實存哲學, Existenzphilosophie) · 현상학(Ph○nomenologie)과 해석학(Hermeneutik),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 · 분석철학(分析哲學, analytic philosophy), 비판이론(Kritische Theoire) 등이 있다.
현대철학 중에서 중요한 철학적 입장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철학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들은 헤겔의 철학을 전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철학을 정초하려 하였다. 그들이 정초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은 인간의 의식과 독립적, 객관적으로 변화 발전한다는 입장을 띤다.
물질의 변화발전의 법칙은 양에서 질(質)로의 전화(轉化)법칙, 대립물의 침투법칙, 부정의 부정법칙 세 가지로 정리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존재에 타당한 사고방식이라 하고, 이것을 자연과 역사에 적용함으로써 자연변증법과 유물사관 또는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으로 구분한다.
자연변증법이란 자연현상 내에서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유물사관이란 유물론적 입장에서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물사관은 역사가 사회의 물질적 기초, 즉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하여 전개되어왔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고, 역사의 발전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즉 공산주의사회로 이행해간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철학의 과제는 “세계해석”이 아니라 “세계변혁”이었다.
이미 헤겔이 생존하고 있을 때, 쇼펜하우어(Schopenhauer,A.)는 헤겔의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에 반대해 인간의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를 말함으로써 이성에 기초한 낙관주의적 인간관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던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극복하고, 활동적인 생명력 자체인 “힘에의 의지”를 역설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통해 기독교적 진리를 포함한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그 뒤에 올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모색을 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니체는 삶의 근원인 힘에의 의지를 체현한 존재인 ‘초인(超人, übermensch)’의 이념을 내세워 낡은 도덕 대신에 새로운 도덕을, 현실적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부르짖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 마련된 생철학적 기초는 베르그송(Bergson,H.)에게서 새롭게 생철학으로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진실로 실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우주 전체를 일관하여 있는 근원적 생명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생명의 특징은 자기로부터 새로운 것을 부단히 산출해 가는 창조적 진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재의 참된 모습은 기계론이나 목적론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실재 자체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직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직관은 개념적, 과학적 사유와 구별되는 것으로써 오직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서 그 대상의 고유한 것, 즉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합일하는 지적 공감(共感)이라 하였다.
생철학의 정신사적 의의는 한마디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에 있다. 합리적인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피안(彼岸)을 지양하고, 추상적 이상주의에 불만을 느끼며, 형식주의적인 체계철학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의지, 생명의 자유,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비합리주의 · 직관주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해탈 · 직관 등에 의한 신비체험을 호소하는 생철학은 종래의 이성적 형이상학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 또 하나의 관상적 사유의 방향을 취하였다. 또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실증과학적 사고경향을 외면하는 데서 현대를 짊어질 철학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현대철학의 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존철학은 생철학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주의 경향이면서 어디까지나 인간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실존철학의 연원은 일찍이 19세기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S.A.)와 니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으로 불안에 직면한 독일에서 야스퍼스(Jaspers,K.)와 하이데거(Heidegger,M.)에 의해 주장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사르트르(Sartre,J.P.)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실존으로 파악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존이란 현실적으로 ‘지금 · 여기’에 있는 존재로서 본질적 존재와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인간은 참으로 독자적인 데서, 결코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지는 특수성을 다른 사람에 의해 대치할 수 없는 데서, 본질적 존재와 구별한다.
인간도 역시 모두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한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존재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일반이라는 것은 전혀 추상적인 것이기에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구체성은 파악되기 어렵다.
따라서, 실존철학에서 실존이란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할 수 없는 인간의 내적 주체성이 강조되고, 각자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단독자 · 개별자로서의 존재를 뜻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실존철학은 자기자신이 타인과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실존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용주의는 19세기 말엽 미국에서 퍼스(Peirce,C.S.)에 의하여 제창되어, 제임스(James,W.)에 의하여 보급되고, 나아가 듀이(Dewey,J.) 등에 의하여 대성된 철학이다.
실용주의도 다른 경험주의적 · 실증주의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을 신뢰하고 모범으로 삼아서 건설하려는 철학이다. 실용주의는 주장하는 철학자에 따라 관점과 내용이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 입장은 경험 내지 실생활을 중시하고, 지식을 본래 경험 · 실생활에 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상통한다.
실용주의는 이성주의 철학처럼 절대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삶에 대한 효과와 유용성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용주의는 상대적 진리의 입장을 취한다. 특히, 듀이는 자기의 입장을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 혹은 실험주의(實驗主義, experimentalism)라고 불렀다. 듀이에게 관념 · 사상 · 사고는 보다 나은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는 행동을 위한 도구이고, 그 조작은 자연과학의 실험에 견주어졌다.
실용주의와 함께 현재 영 · 미를 중심으로 하는 각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철학은 이른바 분석철학이다. 분석철학은 초기의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logial positivism)와 근래에 유력하게된 일상언어학파(日常言語學派, ordinarylanguage school)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논리실증주의철학은 원래 마하(Mach,E.)의 실증주의 정신을 계승하려던 빈의 철학자 슐리크(Schlick,M.) · 카르납(Carnap,R.) 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비인 학파의 학자들이, 영국의 러셀(Russell, B.)이나 같은 비인 출신이지만 영국에 거주하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L.) 등의 영향을 받아 주장하였다.
이들은 자연과학적 명제들의 정확성과 검증가능성을 이상으로 여겼다. 이들은 선천적 지식으로는 수학이나 논리학만을 인정했고, 경험적 지식은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종래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검증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선천적 지식에도 포함되지 않으므로 애매하고도 혼란한 것으로 거부된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사실에 관한 연구는 모두 과학이 수행하는 것이므로, 다만 철학은 언어구조의 논리적 분석을 행하여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보통의 언어표현이 지니는 애매성을 제거하고 그것의 진위(眞僞)를 검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상언어학파는 논리실증주의의 결함이 자각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된 학파이다. 이 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무어(Moore,G.E.)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다. 근래에는 라일(Ryle,G.) · 오스틴(Austin,J.L.) 등의 옥스포드 철학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상언어학파 역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적인 분석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분석은 이제 더 이상 논리실증주의처럼 감각적 지각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명제를 모조리 인식론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적인 애매한 언어표현으로 나타나 있는 문장을 의미가 확실한 명제로 바꾸고, 이것에 의해 상이한 형태의 언어표현에 대해서 각기 독자적인 논리구조를 발견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역사에 관해서 말하는 경우의 언어, 윤리에 관해서 말하는 경우의 언어 등은 비록 그것들이 감각적 지각에 의하여 검증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 독자의 용법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해석학은 논리실증주의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해석학(Hermeneutik)은 “과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세계의 자연적 언어와 “이해”의 조건에 관심을 기울인다. 딜타이(Dilthey.W)는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별해 정신과학의 학문의 기초가 되는 “이해의 역사성”과 그 방법으로서 “이해”를 강조한다.
그러나 가다머(Gadamer)는 하이데거를 따라 “이해”를 방법이 아니라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해의 조건”으로서 “선입견”을 재해석하고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논리실증주의가 자연과학적 명제의 정확성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의 영역을 지나치게 좁게 만들어 버린 것에 반해, 해석학은 텍스트와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행위의 모든 표현 형태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영역을 넓혀 놓았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M.), 아도르노(Adorno,W.)로 대표되는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은 현대의 산업문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거부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들은 주어진 현실과 조건을 긍정하고 그것을 또한 재생산하는 전통이론과 구분해서 자신들의 이론을 “비판이론”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현대 사회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자연과 불합리한 권력으로부터 인간해방을 목표로 했던 계몽적 이성은 현대산업사회에 있어 “해방적 기능”을 상실하고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도구처럼 사용해서 자연을 지배하고 그것에 의해 생존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 소외와 심각한 자연 파괴를 동시에 경험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도덕, 문화, 산업, 학문은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고, 이 도구적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면서 위협하는 양상을 띤다.
그들은 더 이상 계몽이나 맑스주의가 가진 “혁명적 주체”, 즉 프롤레타리아를 믿지 않으며, 끊임없는 비판과 미적인 것에서 해방적 가능성을 발견하려한다. 80년대에 들어 서구적 근대사회와 이성지배적 담론에 대한 자기비판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 [푸코, 데리다 등]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졌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은 인식하는 주체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흄의 경험주의나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그리고 칸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로크로부터 밀까지 이르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도 개인은 합리성의 담지자로서 나타난다. 인식하는 주체는 이성의 힘을 신뢰하는 계몽의 주체였다. 독립적으로 행위하고 인식하는 주체, 계몽, 진보, 과학, 이성은 근대의 표어였다. 계몽의 목표는 자연적 폭력과 무지와 선입견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성의 계발과 계몽에 기초한 근대학문은 기술적 자연지배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과학화와 기술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 또한 더욱 증대되었다.
계몽과 진보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확대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가져왔고, 기술적 자연지배로 인한 심각한 자연파괴를 가져왔다. 오늘날 서구철학에서는 모든 행위의 최종 근거로서의 “개인주의”와 그것이 가진 가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심각한 자연파괴에 직면해서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적 이성의 도구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 온다.
매킨타이어(MacIntyre, A.)같은 철학자는 원자화된 “개인주의”에 기초한 윤리학은 결국 개인의 “느낌”이나 “취향”에 그 근거를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의 윤리적 행위와 가치는 인간이 관계 맺고 있는 공동의 삶의 장, 즉 공동체로부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요나스(Jonas H.)는 “책임의 원칙”을 통해 인간의 자연정복에 의한 생태학적 위기를 지적하고, 자연의 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윤리적 원칙으로까지 요청한다.
이처럼 현대의 위기와 근대 이성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현대 서양철학의 여러 시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단순하게 서양문명의 모방과 학습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전통과 현실적 지반에 다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전통과 현실 속에는 인간을 “공동체적 연관”속에서 파악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 등 오늘날 되살릴 만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울타리에 매여있거나 맹목적으로 전통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대 세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철학하는 출발점으로서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자각하고 또한 그로부터 비롯된 사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본 철학사가 가르쳐 준 철학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한국철학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종교사상 · 가치관 · 사회의식 속에 드러난 한국인의 철학적 이해를 뜻한다. 한국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대략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한국의 전통 철학은 주로 종교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전통사회의 한국철학은 유교 · 불교 · 도교 · 기독교 등 외래 종교사상을 기초로 하거나, 상고(上古)의 한국사상과 한말에 국내에서 자생한 종교사상에 기초하여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였다. 그것은 전통사회에서 종교와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던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철학의 대부분은 외국철학의 이해와 해석의 양상으로 구현되었다. 전통사회의 한국철학이 기반하는 중추적 종교사상은 중국 · 인도 · 서양 등으로부터 전래한 유교 · 불교 · 도교 · 기독교의 외래종교였다.
개항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근현대사회에서는 주로 서양의 철학사조를 중심으로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이론을 도입해 왔다. 그만큼 한국철학은 외국의 철학사상을 한국적 상황에서 수용하는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셋째, 한국철학은 관념적 추상성이나 고증적 번쇄성의 방향보다는 인간 심성(心性)의 내면적 인식이나 신념적 집약화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동시에 시대에 따라 융화성 · 순수성 · 형식성 · 실용성 · 현실성 등 다양한 성격들이 교착하며 전개되어 왔다.
3.1.1. 단군신화
삼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철학 이전의 신화시대 내지 철학사의 선사시대로부터 철학사상이 싹트는 단계로 성장했으나, 우리 민족의 시조신화 내지 건국신화에는 한민족의 기본적인 사유방법이 간직되어 있다.
단군신화는 하늘의 세계[桓因 · 桓雄]와, 땅의 세계[곰 · 호랑이]가 모두 인간의 세계를 지향하는 구조로서, 세계는 하늘과 땅과 인간의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하늘로부터 온 아버지[桓雄]와 땅으로부터 온 어머니[熊女] 사이에서 민족의 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탄생한다는 줄거리는 인간 생명을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유교의 하늘[天] · 땅[地] · 사람[人] 삼재(三才) 사상과 비슷하지만 아직 삼재사상이 유입되기 이전이므로 전형적인 신화적 사유로 보아야 한다. 단군신화에서 우리의 의식 속에 ‘인간세상을 긍정’하며,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과 ‘우리의 강토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1.2. 3교의 전래
삼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시기에 유교 · 불교 · 도교의 3교(三敎)가 차례로 중국 혹은 인도로부터 전래되었다. 3교는 삼국의 발전에 필요한 도덕 규범과 철학사상의 원리를 제공하여 우리 민족의 철학적 정신을 계발하고 성장시키는 데 풍족한 영양을 공급하였다.
당시 삼국은 확장과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매우 심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유 · 불 · 도 3교는 국민정신을 정의로운 가치관으로 강인하게 연마해주고, 동시에 보편성의 논리와 박애의 도덕성으로 서로 포용하고 융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3.1.3. 삼국시대 유학
원광(圓光)이 신라 청년들의 수련단체인 화랑도에게 실천 규범으로 가르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유교와 불교의 덕목을 그 시대에 맞게 종합하여 충성 · 효도 · 신의 · 용감성 · 자비심으로 제시한 것이다.
화랑 김흠춘(金欽春)은 황산벌 싸움에서 아들 반굴(盤屈)에게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충성과 효도의 양쪽 모두를 완전히 이룰 수 있다(忠孝兩全).”고 훈계했는데, 이는 갈등하는 두 도덕규범의 통합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국가를 위한 충성과 부모를 위한 효도는 서로 다른 공동체를 위한 도덕규범이지만, 구체적이고 긴박한 상황에서 충성을 중심으로 이 규범들을 통합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능비와 진흥왕의 순수비는 당시의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유학적 정치원리를 보여준다.
3.1.4. 불교철학의 융성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우리의 불교철학사상은 당시 중국을 능가하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고구려 승랑(僧郞)의 삼론사상(三論思想), 신라 원측(圓測)의 유식사상(唯識思想), 원효(元曉)의 화쟁사상(和諍思想), 의상(義湘)의 화엄사상(華嚴思想)이 철학적 사유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승랑과 원측은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중국의 대승불교는 중관철학(中觀哲學)과 유식철학(唯識哲學)이 양립하고 있었다. 중관철학은 모든 존재는 독립된 자기 성질이 없다고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실체를 공(空)이라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유식철학은 인간의 분별과 집착을 타파하여 나타나는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여 진실한 성품으로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유(有)를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승랑은 중관철학의 계통인 삼론사상을 체계화하여 훗날 수(隋)나라 때, 길장(吉藏)에 의해 완성되는 중국 삼론종의 선구자가 되었다. 승랑은 불교의 궁극적 진리인 중도(中道)를 인식하는 방법으로서 세속적인 진리인 세제(世諦)와 초월적인 진리인 진제(眞諦)의 2제를 종합시켜 파악하였다.
있다고 말한 ‘세제’와 이를 부정하여 없다고 말한 ‘진제’를 통합하여 또 하나의 ‘세제’로 삼고, 다시 그것을 부정하는 ‘진제’를 드러내가는 변증법적 인식방법이다. 또한 그는 ‘중도’란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이 ‘나누어지지 않는 중도(不二中道)’가 바로 2제(世諦와 眞諦)의 본체라고 파악하였다.
원측은 중국에 유식철학을 처음 전래한 현장(玄裝)의 제자가 되어 현장의 법통을 이은 규기(窺基)와 쌍벽을 이룬 유식철학의 거장이다. 그는 『해심밀경소(海深密經疏)』 등 유식에 관한 여러 저술을 하였다. 그는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조화하려는 독특한 융화적 입장을 가졌고, 이에 따라 규기의 학통과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의 학풍은 도증(道證)을 거쳐 태현(太賢)으로 계승되면서 신라 유식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신라의 불교철학은 절정기를 이루었다. 원측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신라에서는 원효와 의상 등이 활동하였다. 원효는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가장 비중이 큰 불교철학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당시 불교가 여러 종파로 분열하여 갈등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종파를 융화시킬 수 있는 이념을 추구하였다.
그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주석하여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또는 海東疏라 일컬어짐.]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일심(一心)으로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2문, 곧 본체와 현상의 양면을 통합하는 『대승기신론』의 구조에서 중관과 유식의 대립이나 출세간(出世間 : 초월성)과 세간(世間 : 세속성)의 대립을 극복하는 융화의 근원을 확인하였다.
또한 불교의 모든 종파적 이론을 각각의 한계 안에서 긍정하면서 서로의 논쟁을 극복하여 전체적 융합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란 저술에서 나타나는 것 처럼, 그의 철학적 중심 문제는 화쟁(和諍)의 논리이다. 모든 종파적 인식에 대한 긍정과 부정[立 · 破], 동일성과 차별성[同 · 異]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또한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평등일미(平等一味)의 화쟁적 경지를 선명하게 제시했던 것이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본국에 돌아와서 의상은 신라의 화엄사상을 이끌어갔다. 화엄사상은 교리 상으로도 대승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삼국통일기 이래로 신라 불교를 주도하였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방대한 체계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해 전부 210자(7音30行)의 운문형식으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었다.
간결의 극치인 이 『법계도』는 모든 화엄사상을 연역할 수 있는 근본원리가 제시된 것으로 중요시된다. 또한 이 『법계도』는 하나의 도인(圖印)으로 표현되어 화엄세계, 곧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의식에서 마치 다라니(呪文)처럼 암송되고 있다. 그의 사상의 특징으로는 화엄사상의 번쇄한 이론에 빠지지 않고 핵심정신을 파악하여 실천하는 데 주력한 것을 들 수 있다.
신라 말기에는 화엄사상을 비롯한 교학사상(敎學思想)들이 점차 형식화되고 관념화하고 있었다. 불교교단도 왕실과 귀족에 의탁하여 사치스러워지는 폐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때 선풍(禪風)이 일어나 불교교단의 쇄신과 불교정신의 신선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선사상(禪思想)은 이미 7세기에 법랑(法郞)에 의해 당나라에서 전해졌으나, 9세기 초 도의(道義)가 6조(六祖) 혜능(慧能) 계통의 남종선(南宗禪)을 도입한 이후에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 선학(禪學)은 지방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세우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신라 말의 ‘선풍’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가지산(迦智山)의 도의(道義) 등 교학의 문자적 내지 개념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하여 순수한 선의 방법을 추구하는 순선(純禪)의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실상산(實相山)의 홍척(洪陟) 등 교와 선의 융통을 추구하며 세속적 태도까지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융선(融禪)의 경향이다. 이 두 경향 중 융선 계열이 점차 성행하였다.
3.1.5. 삼국의 도교
삼국 초에 이미 노자(老子)의 사상이 수용되었고, 삼국 말에는 도교신앙이 전래하면서 도교사상의 기틀이 정비되었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다(知足不辱)”는 노자의 『도덕경』 구절은 전쟁터에서 거듭 인용되었을 만큼 생활철학의 지혜로 활용되었다. 또 무위(無爲)와 불언(不言)의 자연주의사상은 정치와 처세의 원리로 활용되며 도교의 대표적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3.1.6. 3교의 융화론
삼국시대의 사상적 특징은 융화정신(融和精神)을 존중한다는 데에 있다. 유 · 불 · 도 3교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루는데 서로 조화롭게 역할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화랑 난랑(鸞郞)의 비문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사상인 풍류(風流)는 유 · 불 · 도 3교를 포함하여 대중을 교화하는 오묘한 도리(玄妙之道)라고 밝혔다. 화랑은 도덕과 의리를 서로 연마하고 노래와 춤으로 함께 즐기는 가운데 여러 사상을 포용하고 융화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정신을 기르는 데 기여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유 · 불 · 도 3교는 ‘세발솥의 발(鼎足)’과 같아서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하여 다양한 사상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최치원은 진감국사(眞鑑國師) 비문의 첫머리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는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한다.”고 하였다. 이는 진리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진실성을 갖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우리 민족이 불교나 유교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적 근거를 밝히고 있다.
3.2.1. 불교철학의 발전
불교는 고려의 건국과 더불어 국가의 지도적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1조에서 고려의 건국은 부처의 호위에 힘입었다고 밝히면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을 보호하도록 당부하였다. 이처럼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불교는 고려시대 동안 교학과 선풍이 다양한 가운데 융화와 통합의 방법을 추고하였다.
중요한 인물의 사상으로는 균여(均如)의 화엄사상, 의천(義天)의 천태사상(天台思想)과, 지눌(知訥)의 선사상 및 보우(普愚)의 임제선(臨濟禪) 등을 들 수 있다.
10세기 후반의 균여는 화엄사상의 입장에서 우주 만물의 본체인 성(性)과 그 현상인 상(相)의 일치를 강조하는 성상융회론(性相融會論)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화엄사상을 유식사상인 법상종(法相宗)과 통합하려는 융화론(融和論)이다. 그가 향가(鄕歌) 「보현십원행가(普賢十願行歌)」를 지은 것도 대중을 교화하여 융화정신의 실천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11세기 말 의천은 천태종을 일으켜 여러 종파를 통합하기 위해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융화론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교학(敎學)의 입장에서 선학(禪學)의 포용을 추구하여 교관병수론(敎觀竝修論)을 제시하였다. 그는 “언어나 형상을 떠나면 미혹에 넘어지고 여기에 집착하면 진실에 혼미할 것이다.”라 하여 문자를 중시하는 교학과 문자를 무시하는 선학의 양쪽을 모두 인정하였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고집하는 논쟁을 마치 있지도 않은 토끼뿔의 길이를 다투는 것과 같고, 환상으로 본 꽃의 빛깔을 다투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12세기 말 지눌은 선의 입장에서 교를 포함하려는 논리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이 변하지 않는 본체에서 나타난다는 화엄의 성기설(性起說)을 선에서의 “마음이 곧 부처이다(心卽是佛).”라는 주장과 일치시켜 파악하였다.
그는 선과 교의 융화를 통해 한국의 독창적인 선으로서 조계선(曹溪禪), 곧 보조선(普照禪)을 창립하였다. 그는 수행방법으로 먼저 ‘부처와 내가 일체임’을 단번에 깨우치는 돈오(頓悟)를 하고 이 깨달음에 근거하여 점차로 수행해가는 점수(漸修)를 병행하는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을 제시하였다.
지눌의 선풍(禪風)은 활발하게 계승되었지만, 14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왕조가 말기적 쇠퇴를 보이면서 불교교단의 타락상 또한 심해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보우와 혜근(慧勤) 등이 임제선을 도입해 선풍을 쇄신하기 위한 활력을 불어 넣었다. 보우는 교단의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선원(禪院)의 실천규범으로 회해(懷海)의 청규(淸規)를 받아들여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하루동안 먹지 말라.”라는 근로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파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9산(山)의 통일을 주장하는 일의사상(一義思想)을 제시하였다. 일의가 곧 일심(一心)이라 하여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온갖 분파의 대립을 무의미한 것으로 지적하였다.
3.2.2. 고려의 도교
고려시대에 도교는 국가의 후원을 받아 도관(道觀)의 건립이 이루어지고, 의례 · 수련 및 신앙 등이 성행하여 도교의례는 민간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도교사상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이중약(李仲若)이 도장(道藏)을 읽어 도교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송나라에 유학하여 도교의 요체를 배워 복원궁(福源宮)에서 강석(講席)을 열었다 한다. 또한 예종(睿宗)이 궁중에서 한안인(韓安仁)에게 『도덕경』을 강론하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사상적 연구는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2.3. 고려의 유학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주도적 지위를 유지했지만, 정치제도나 정치원리에서의 유교의 영향력도 상당히 컸다. 고려 초의 유학자 최승로(崔承老)는 상소문에서 “불교를 수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유교를 실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이다.”라 하여 불교와 유교의 역할을 구별하면서도 둘 사이에 균형을 촉구하고 있다. 당시 유학사상은 철학적 체계성을 갖추지 못하고 도덕규범이나 정치원리 내지 문학적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 안향(安珦)이 원(元)나라로부터 송대(宋代) 주희(朱熹)의 학풍을 수입하면서 유교사상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주희의 학풍, 곧 도학(道學)은 성리학(性理學)의 철학적 이론으로 기초를 확립하였다. 즉, 의리론(義理論)으로 행동원리를 확인하고, 예학(禮學)의 행동양식도 정밀하게 하며, 수양론(修養論)의 방법과 절차를 갖추고, 경세론(經世論)의 정치적 실천체계도 제시했던 것이다.
이후 한국철학은 도학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는 성리학에 관심의 초점을 두게 된다. 고려 말 이곡(李穀)은 유학의 핵심 개념을 정심(正心)이라 파악하여 불교의 핵심개념인 관심(觀心)과 대비시켰다. 이색(李穡)은 천지를 기(氣)라 인식하고 인간과 사물의 근거(所以然)는 이(理)라 인식하였다.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시조로 지칭된 정몽주(鄭夢周)는 “유교인의 도는 모두 일상생활에서 쓰이며, 평범하고 통상적인 것이다. 먹고 마시는 일이나 남녀가 만나는 예절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이요, 여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다.”고 하여, 구체적 현실과 궁극의 원리가 서로 떠날 수 없는 연관성에서 유교의 진리관을 지적하였다. 그는 절의를 지킨 의리정신에서나 유교를 옹호하기 위해 불교를 비판했던 입장에서나, 조선시대에 고려 말 도학의 대표적 인물로 존중되었다.
3.3.1. 조선 전기의 철학
(1) 조선 초의 유학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서 활동하던 인물은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의 신념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강상론(綱常論)에 입각하여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입장에서 새 왕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절의(節義)정신이었다. 다른 하나는 혁명론(革命論)에 입각하여 새 왕조를 통해 유교이념을 확립시키려는 개혁정신이다.
전자에 속하는 인물은 고려 말에 순절한 정몽주와 조선 초에 모든 관직을 거부한 길재(吉再)가 있다. 후자에 속하는 인물로는 고려 말부터 혁명에 가담하여 조선 초 개혁의 중심적 활동을 하였던 정도전(鄭道傳)과 조선 건국 후 새 왕조의 정비에 참여하였던 권근(權近)이 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제도를 유교이념에 근거하여 정립하는 작업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불교를 비판함으로써 유교이념에 따른 사회 개혁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과 『심기리편(心氣理篇)』은 도학의 정통주의적 신념과 성리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불교를 이단(異端)으로 비판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는 불교의 근본개념은 ‘심(心)’이고, 도교(老莊哲學)의 근본개념은 ‘기(氣)’라 한데 대하여 유교의 근본개념을 ‘이(理)’라 지적하였다. 이는 불교의 주관적 유심주의와 도교의 객관적 자연주의를 서로 대립시키고 이를 지양하는 철학으로서 유교의 이성적(理性的) 합리주의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이 불교 비판을 통해 유교이념을 제시하였다면, 권근은 유교이념 자체의 이론적 체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유교의 기본체계를 도해(圖解)의 방법으로 해명하였다.
『입학도설』의 제1도인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성리학의 전반적인 문제를 하나의 도형 속에 집약하여 극도로 간결하게 체계화시킨 것으로 조선조 성리학의 선구적 업적이다. 또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유교경전 주석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도학의 정착
조선조의 도학은 관료층보다도 도학이념을 탐구하고 실천하던 선비들, 곧 사림(士林)이 담당하였다. 도학이념을 순수하게 추구한 사림은 집권관료 세력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예리하게 비판했고, 이에 따라 사화(士禍)가 잇달아 일어나 사림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김종직(金宗直) 문하의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은 『소학(小學)』의 실천규범을 중시하였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이 시대 대표적 도학자인 16세기 초의 조광조(趙光祖)는 ‘이(理)’에 의해 하늘과 인간이 조화하는 우주론과 ‘도(道)’에 의해 임금과 백성이 조화하는 사회상을 도학적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3) 성리학의 융성
16세기에는 도학의 철학적 기초인 성리학이 융성하게 발전하는 시기이다. 성리학은 존재의 질료적 근거인 ‘기’와 원리적 근원인 ‘이’의 두 가지 기본형식을 갖춘 이기론(理氣論)을 기초로 한다. 여기에서 이가 기보다 근본적이라고 보는 입장인 주리론(主理論)과 기가 이보다 근본적이라 보는 주기론(主氣論)으로 구분된다.
이 시기 성리학의 이론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선구자로서 개성의 서경덕(徐敬德)은 가장 근원적인 존재를, 맑고 형체가 없는 하나의 ‘기(湛一淸虛之氣)’라 하고, 인간과 만물의 생멸(生滅)을 기가 모이고 흩어짐(聚散)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기의 내부에서 통제하는 기능(氣之宰)을 이라 하여, 주기론의 입장을 선명히 하였다.
이에 비해 경주의 이언적(李彦迪)은 ‘태극’개념에 관한 손숙돈(孫叔暾) · 조한보(曺漢輔)의 논쟁에 뛰어들어 궁극 존재인 태극이 이임을 확인하여 주리론의 입장을 밝혔다.
태인(정읍)의 이항(李恒)은 이와 기가 선후관계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 하여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제시하였다.
영남 산청의 조식(曺植)은 의리론과 수양론에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다. 또 『학기유편(學記類編)』을 저술하여 성리학의 개념체계를 도상(圖象)으로 분석하였다. 조식은 그 문하에 탁월한 학자들이 모여 한 학파를 이루었으나, 그의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에 처형되면서 학통이 무너지고 말았다.
(4) 이황과 이이
16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봉우리는 영남 예안(안동)의 이황(李滉)과 경기 파주의 이이(李珥)이다. 이들은 성리설의 특정 문제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중심으로 본격적 논쟁을 전개함으로써 성리학을 본격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착한 감정인 사단(四端 : 惻隱 · 羞惡 · 辭讓 · 是非의 마음)과 인간의 통상적 감정인 칠정(七情 : 喜 · 怒 · 哀 · 懼 · 愛 · 惡 · 欲)을 이기론의 개념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른바 ‘사단칠정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황은 광주의 기대승(奇大升)과 토론하면서 사단을 칠정에 대립시켰으며, 이와 기가 서로 능동적으로 발동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반면, 이이는 파주의 성혼(成渾)과 토론하면서 사단도 칠정과 같은 감정으로서 다만 착한 감정만을 가리킨 것이라 하여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욕망에 근거한 인심(人心)과 성품에 근원한 도심(道心)의 관계를 두가지 상반된 근원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서로 변환될 수 있는 한 마음의 두 상태인가에 관한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의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황은 이원론적 경향을 보이며 주리론의 입장에 선다면, 이이는 일원론적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성리학에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으로서 조선조 성리학의 대표적인 두 학통의 원류를 이루었다. 이황은 ‘경(敬)’의 개념을 통한 내면의 수양론적 관심에 치중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연마하고 지키기 위해 산림의 선비생활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이이는 ‘성(誠)’과 ‘실(實)’의 개념을 매개로 사회적 실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나아가 국가의 당면한 과제로서 시무론(時務論)을 중심으로 경세(經世) 사상을 깊이 추구하고, 특히 현실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시폐론(時弊論)과 과감한 혁신을 요구하는 경장론(更張論)을 제시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성리학과 수양론의 핵심을 도상의 형식 속에 간결하고 체계적으로 압축하였고,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유학의 체계를 정리하였다. 두 저술은 이 시대의 학문적 범위와 핵심을 정리한 대표적 저술이기도 하다.
(5) 조선 전기의 불교
조선 초기 정도전을 비롯한 불교 비판에 대응하여 세종 때의 득통(得通)은 『현정론(顯正論)』 ·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저술하여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불교의 일치를 확인하고 불교의 보편적 진실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모든 불교경전의 가르침을 ‘감정을 제거하여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去情顯性)’이라 집약하면서, ‘성 · 정’의 실체를 깨닫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이라 하여 ‘심 · 성’의 배양에 중점을 두는 유교의 입장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학자이면서 불교와 도교에 융통하였던 인물인 김시습(金時習)은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선학적(禪學的)으로 해석하여, 법성(法性)을 “진리의 세계에 계합한 진실한 마음의 묘용으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기에 오직 청정한 마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심인(心印) · 조의(祖意) 등 선학의 기본 개념 10가지를 설명한 『십현담(十玄談)』을 정밀하게 해석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저술하여 선학을 심화시켰다.
명종 때 불교 재건을 시도했던 보우(普雨)는 「일정론(一正論)」에서 ‘일(一)’은 ‘성실하여 망령됨이 없는 것’이며 ‘하늘의 이치’요, ‘정(正)’은 ‘치우치지도 사특하지도 않아 순수하여 잡박함이 없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이라 정의하였다.
나아가 그는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서로 일치하며, 하늘과 인간이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하여 화엄사상을 유교적 이기설 내지 천인합일설과 일치시키고 있다. 그는 ‘화엄’을 돈교(頓敎)라 규정하고, “체(體)가 본래 생기지 않았으니 시작도 마침도 없고, 용(用)이 실로 소멸하지 않으니 이루어짐도 무너짐도 없다. 이 화엄은 모든 교학의 근본이요 만법의 종지(宗旨)가 된다.”하여, 화엄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이름 높았던 서산대사(西山大師) 곧 휴정(休靜)은 유교 · 불교 · 도교가 모두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여, 삼교일치를 주장하였다. 자신의 대표작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부처의 마음(禪)과 부처의 말씀(敎)이 하나의 불교를 이루는 것으로 ‘선’과 ‘교’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휴정의 문하인 사명당(四溟堂) 곧 유정(惟政)은 “성인과 범부의 성품은 깨달았는지 미혹한지의 구별이 있을 뿐이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종자가 있다고 하겠는가. 지극한 어리석음으로 큰 깨달음을 바라는 것은 그 형세에 천지의 차이가 있지만 한 생각으로 기틀을 돌이키게 되면 곧 본래의 깨달음과 같아진다.”하여, 불각(不覺)의 중생이 깨달음을 만나면 본각(本覺)의 부처와 일치한다는 입장에서 중생과 부처의 근원적 평등성을 확인하고 있다.
3.3.2. 조선 후기의 철학
(1) 사상적 다변화
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부터 조선사회가 후반기로 접어들자 사상 풍토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도학의 정통성이 강화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학 일변도를 벗어나 양명학(陽明學) · 실학(實學) · 서학(西學) 등 여러 유파가 등장하여 다변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도 도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었으며, 성리학 · 예학 · 의리론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정립된 성리학설을 토대로 도학이념의 행동양식으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준으로 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토론이 활발해졌기 때문에 17세기는 예학(禮學)의 시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의례(儀禮)는 가정과 지역사회, 또는 국가의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통치질서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학논쟁은 의례의 정신을 밝히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의 의례체제와 친족질서의 의례체제가 맞서서 전개되다가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또한 병자호란(1636)으로 만주족인 청(淸)나라에 굴복한 17세기 중엽 이후로 도학적 이념에는 조선 사회의 중화(中華)문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의리론, 곧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또는 尊攘論 · 華夷論)이 팽배하였다.
의리론의 배청(排淸)의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중화문화의 수호자라는 문화적 자부심이 강화되는 동시에, 청나라의 문물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보수적 폐쇄성이 나타났다.
(2) 호락논쟁
이 시대에 성리학은 한편으로 이황에서 이이에 이르는 사단칠정론 · 인심도심론의 쟁점을 계속 심화시켜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논쟁점을 제기하였다. 먼저 정경세(鄭經世)와 김장생(金長生)은 각기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을 지지하여 학파적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이현일(李玄逸)은 이이의 성리설을 조목별로 철저히 비판하여, 이황의 이원론적 주리론을 계승하는 학파를 정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영남의 장현광(張顯光)은 이황의 성리설이 지닌 문제점을 인식하고, 기호의 김창협(金昌協)은 이이의 성리설에서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이른바 절충론적 입장을 전개하였다.
18세기 초에는 기호학파에서 권상하(權尙夏)의 제자인 아산의 이간(李柬)과 홍성의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인간의 본성과 동물(혹은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 즉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간 등은 인간이나 사물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타고나는 성품은 모두 ‘이’로서 같다고 보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한원진 등은 인간과 사물의 타고난 성품에는 ‘기’도 내포되어 있으며, ‘기’(기질)가 다른 존재는 성품도 다르다고 보아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하였다.
이간의 ‘구동론’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서울 근교에 많이 살아 낙론(洛論)이라 하고, 한원진의 ‘상이론’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충청도에 많이 살아 호론(湖論)이라 하여, 이 논쟁을 호락논쟁이라고도 한다.
이간의 인물성구동론에서는 성즉리(性卽理)의 논리에 따라 성(性)을 바로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파악하여, 인간과 사물의 성품이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은 성이란 기에 내재된 뒤에 붙은 명칭으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규정하며, 그는 성을 기질과의 관계 속에서 성3층설(性三層說)을 제시하였다.
첫째, 기질을 초월한(超氣質) 성은 태극이요 인간과 사물이 공유하는 것이며, 둘째, 기질에 원인하는(因氣質) 성은 기질에 따라 인성과 물성이 다르게 되며, 셋째, 기질에 섞인(雜氣質) 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사물마다 다른 것이라 한다.
따라서 한원진은 이간의 성개념은 기질을 초월한 것으로 그것은 성이라기 보다는 태극 내지 이(理)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며, 그가 의미하는 성은 기질에 원인하는 것이라 구별한 것이다.
이간의 구동설을 지지하는 낙파(洛派)에는 이재(李縡) · 박필주(朴弼周) · 어유봉(魚有鳳) 등이 속하고, 한원진의 상이론을 지지하는 호파(湖派)에는 윤봉구(尹鳳九) · 이현익(李顯益) · 채지홍(蔡之洪) 등이 속한다.
(3) 양명학
성리학의 성즉리설은 인간의 성품을 이라 파악하는 객관적 입장인데 반해, 왕수인(王守仁)을 통해 정립된 양명학, 곧 심학(心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은 인간의 마음을 이라고 확인하는 주체성을 기준으로 하는 입장이다.
양명학은 16세기 초 중종 때부터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이황의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에서 비판을 받은 이래, 양명학은 이단(異端)으로 규정되어 철저히 배척되어 공개적인 학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제두(鄭齊斗)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구된 양명학은 그의 문하에서 강화학파(江華學派)라는 하나의 학맥을 이루어 미약하게나마 명맥이 계승되었다.
정제두가 양명학에 기울어지자 스승 박세채(朴世采)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여 그를 경계하였다. 동문 민언휘(閔彦暉)도 그의 양명학적 학풍을 비판하였다. 가장 가까운 스승과 친우들로부터 비판과 질책을 받았지만, 정제두의 양명학적 신념은 확고하였다.
정제두는 인간에서 생기와 정신이 합한 것을 생리(生理)라 하고, 이 생리가 마음에 집을 짓고 있다 하여, 심즉리설의 입장에서 이를 마음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이가 마음의 생리가 아니라면 공허한 것이라 하여, 주희의 이개념을 비판한다. 나아가 그는 기 속에 이를 포함하여, 구체적 감각의 세계인 기를 인간존재의 근원으로 확인한다. 그는 성을 양지(良知)의 본체로, 정을 양지의 작용으로 파악하여, 성 · 정을 양지 내지 마음의 체용(體用)으로 보는 심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양명학의 가장 진지한 지지자였으나, 동시에 그는 양명학의 문제점을 통찰하는 객관적 안목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존언(存言)』 하(下)에서 “왕수인의 치양지설(致良知說)이 매우 정밀하지만, 그 폐단은 혹 정에 맡기고 욕망을 따르는 어리석음(任情從欲之愚)이 있다.”하여, 양명학이 욕망을 절제하는 데 철저하지 못하고 욕망에 방임하는 쾌락주의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간파하고 있다.
정제두를 계승한 강화학파는 역사학의 이긍익(李肯翊)이나 고증학의 신작(申綽) 등 실학에서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이건방(李建芳)를 거쳐 정인보(鄭寅普)로 이어지는 근대 계몽사상기에까지 계승되어갔다.
(4) 유학-서학 논쟁
17세기부터 중국을 통하여 전래하기 시작한 서학(西學), 곧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개방된 의식을 지닌 실학파(實學派) 인물 중에서 나왔다. 이수광(李睟光)이 처음으로 서양문물과 함께 마테오리치(Ricci,M.)의 보유론(補儒論)적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였다.
이후, 이익(李瀷)은 천문학 등 서양과학지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였다. 이익의 학맥인 성호학파(星湖學派) 안에서는 서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신후담(愼後聃)과 안정복(安鼎福)은 천주교 교리 및 서양 중세철학의 천주 · 영혼 · 물질 등의 개념을 성리학적 이론으로 비판하였다. 특히 신후담은 「서학변(西學辨)」을 저술하여 천주교의 영혼론인 『영언여작(靈言蠡勺)』을 조목별로 비판하여, 성리학적 심성론과 기독교적 영혼개념을 대비시켰다.
그러나 이벽(李檗) ·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 · 정약종(丁若鍾) 등은 서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신앙까지 갖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은 경전 주석을 할 때 천주교 교리의 천주 · 영혼 등의 개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丁夏祥)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저술하여 신 존재증명과 제사의 부정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천주교 교리를 유교사회에 소개하였다.
이처럼 유교-서학 논쟁은 서양철학과 성리학의 첫 만남이면서 첫 논쟁이었다는 점에서 서로의 성격을 비교할 수 있는 매우 의미깊은 기회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은 이단으로 철저하게 배척받아 개항 후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지하신앙운동으로 유지되었다.
한편,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이나 성호학파의 정약용의 경우에서처럼, 서양과학지식을 수용하면서 오행론(五行論)을 거부하는 등 성리학이 기반한 자연철학적 기초가 흔들림으로써, 철학적 근거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새로운 모색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5) 실학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과 도학이념의 형식화를 비판하고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개혁사상으로서 실학이 성장하였다. 실학(實學)은 개방적 자세로 양명학 · 서학 등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다.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활용하고, 나아가 사회개혁정신으로서 신분적 억압질서를 개선하려는 근대적 의식에 눈떴고, 여기에서 우리의 역사 · 지리 · 언어 등 국학(國學)에 관한 민족적 관심이 싹텄다.
실학사상의 발생기인 17세기에 이수광은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거두기를 요구하는 무실론(務實論)을 제시하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백과전서적인 폭넓은 지식을 수용하는 개방적 자세를 보였다.
유형원(柳馨遠)은 토지제도를 비롯한 행정제도의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눈금이 잘못된 저울은 저울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여, 도학의 근본주의에 맞서서 현실의 구체성을 강조하였다.
실학파가 성립되는 18세기에 이익은 성호학파를 열어 제도개혁론과 더불어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 실용적 합리성을 존중하며, 우리의 역사 · 지리 등 국학 연구를 활발하게 일으켰다.
북학파의 홍대용도 도학의 허위성을 비판하고 서양과학의 세계관을 수용하여, 인간에서 사물을 보는 주관적 시각이 아니라 하늘에서 사물을 보는 객관적 시각을 실학파의 철학적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은 소설의 풍자를 통해 도학의 위선을 고발하고 청조 문물의 실용성 · 효율성을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정덕(正德)을 근본으로 삼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말단으로 삼는 도학의 도덕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이용후생을 앞세우고 정덕을 뒤로 돌리는 실리적 · 실용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박제가(朴齊家)도 도학의 ‘배청(排淸)’ 의리론을 버리고 청조의 생산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실용적 관심을 보였다. 이용후생의 경제를 통해서만 정덕의 도덕성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그가 폐쇄성을 깨뜨리고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개방적 사유의 경제적 응용이었다.
19세기는 실학사상이 전성기를 이루면서 동시에 쇠퇴하는 시기이다.
성호학파를 이은 정약용은 고증학 · 양명학 · 서학 등의 입장을 폭넓게 수용하여 독자적 체계로 방대한 경전(經傳) 주석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경학을 넘어서 실학의 철학적 입장을 밝혔다. 그는 성리학이 인간의 성품을 ‘이(理)’라 한 것과는 달리, 성품을 ‘기호(耆好)’라 하여 본체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적 경향에서 성품을 인식하였다. 또한 덕은 선천적 본질이 아니라 후천적 실천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라 하여 실천적 추구를 중요시하였다. 그는 행정체제에 대한 개혁론을 체계화하여 경세론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북학파를 이은 김정희(金正喜)는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고증학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금석학에 도입하였다.
실학파의 마지막 거장인 최한기(崔漢綺)는 근원적 실체를 기 또는 신기(神氣)라 하고, 인간의 인식작용을 경험-추측-증험(證驗)의 과정으로 제시하여 인식의 경험주의적 성격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기의 작용을 운화(運化)라 하여 기학(氣學) 내지 기철학(氣哲學) 이라는 유기론(唯氣論)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인식 작용의 경험주의적 성격을 철저히 분석하였고,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응용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6) 조선 후기의 불교
조선 후기 불교계는 인악(仁岳)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파와 연담(蓮潭)을 중심으로 한 호남유파가 각기 학풍을 형성하였다. 인악은 일심(一心)의 개념을 통하여 유학과 불교의 융화론, 곧 회통론(會通論)을 제시하며, 유식론(唯識論)의 교리를 밝혔다.
연담도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유학의 “선행에 복이 있고 악행에 재앙이 있다(福善禍淫).”는 말과 일치시키는 등 유교와 불교의 회통론을 제시하였다. 당시 연담은 불심(佛心)과 중생심(衆生心)이 동일하다는 일원론을 주장하여 묵암(默菴)이 양자를 구별하는 이원론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한다.
19세기 초 선문(禪門)에는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사이에 선(禪)의 분류체계에 따라 3종선(三種禪)과 2종선(二種禪)의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에서 향엄(香嚴) · 앙산(仰山) 사이에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의 분별이 고려 말 각운(覺雲)에 계승된 일이 있었지만, 일대의 선학 논쟁으로 전개된 것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였다.
백파는 『선문수경(禪門手鏡)』을 저술하면서, 『임제어록(臨濟語錄)』의 3귀절을 각각 근기(根器)의 깊고 옅음에 따라 조사선 · 여래선 · 의리선의 3종선으로 해석하여 3종선의 분류체계를 제시하였다.
이에 초의는 백파의 3종선설을 비판하였다. 선을 인명(人名)에 따라 분류하면 조사선과 여래선이 있고, 법명(法名)에 따라 분류하면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이라 하며, 격외선은 조사선이요, 의리선과 여래선은 같은 등급으로 보았다.
백파와 초의의 선학 논쟁은 그의 문하에까지 이어져 백파의 문인 설두(雪竇)와 초의의 문인 우담(優曇) 사이에 재론되었다.
우담은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에서 백파가 살인도(殺人刀)를 여래선에, 활인검(活人劒)을 조사선에 대응시키는데 대해 살인도와 활인검을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살(殺)’과 ‘활(活)’이 서로 떠날 수 없고 함께 온전한 것이 조사선의 도리라고 지적하였다.
3.3.3. 근대의 철학
(1) 근대적 위기와 변혁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서양의 근대 문물이 압도적으로 밀어닥쳤다. 도학 이념은 서양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서양문화를 인간의 욕망만을 개발하는 반도덕적인 것으로 여겨 엄격하게 배척하였다. 여기서 이른바 한말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등장하였다.
당시 서양과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의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도학파는 국가존망, 그리고 문화적 · 이념적 위기의식 속에서 오랑캐에 대한 양이론(洋夷論)으로 배척하는 전통적 대의론(大義論)과 이단에 대한 척사론(斥邪論)의 정통적 배척의지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후 도학파는 척양(斥洋) 및 척왜(斥倭)의 배척 의지와 의병운동의 저항정신으로 침략세력과 투쟁하였다.
(2) 한말 성리학
19세기 말은 정치적 위기상황이었지만 동시에 성리학도 활발한 논쟁 속에서 융성하였다. 양평의 이항로(李恒老), 장성의 기정진(奇正鎭), 성주의 이진상(李震相)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은 영남 · 기호의 어느 쪽에서나 주리론(主理論)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항로는 마음의 본체(本心)와 명덕(明德)을 이(理)라 하여 심주리론(心主理論)을 제기하였다. 기정진은 기(氣)를 이에 포함시켜 기의 능동성을 부정하여 유리론(唯理論)을 제시하였다. 이진상은 심즉리설(心卽理說 :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구별됨.)을 주장하여 심주리론의 한말 성리학을 확립하였다.
이에 비해 전우(田愚) · 송병선(宋秉璿) 등 마음을 기라 보는 율곡학파의 정통적 입장도 있어서 이 시대의 성리학적 과제는 인간의 마음을 이기론으로 파악하는 데 집중되었다. 특히 이항로 문하에서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가 심설(心說)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전우는 한말 주리론의 성리학 거장을 각각 비판하면서 자신의 심성개념을 존비의 상하구조로 파악하고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을 제시해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심설 논쟁은 역사적 위기 속에서 인간의 주체적 결단의 근거인 마음의 문제가 철학적 과제로 제기된 것이다.
(3) 개화사상
도학이 전통을 고수하는 수구론(守舊論)에 집착하고 있는 데 반해,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도입하여 우리의 힘을 강화하자는 자강론(自强論) 내지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개화론(開化論)이 나타났다.
개화사상은 박규수(朴珪壽)를 중심으로 발생했던 만큼, 실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중국의 자강론과 일본의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의 영향 아래 서양근대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화사상은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산업 · 정치 · 교육 등에 서양의 근대 제도를 도입하려는 과감한 개혁론으로 전개되었다. 상투와 갓을 갖춘 의관(衣冠)을 지키려는 도학파의 수구론에 대해 양복 입고 머리 깎은 개화파의 개혁론이 극단적으로 대립했을 때,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의 정신적 규범들을 지켜 서로 조화시키려는 절충적 입장으로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나타났다.
김윤식(金允植)은 개화론자이면서 “신학(新學 : 서양학문)의 체계가 공자의 교육과목[六藝]과 상통한다.”하여 전통과 근대 질서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유인식(柳寅植)은 “심성이기(心性理氣 : 성리학)가 전날의 학술이라면 기화성광(氣化聲光 : 자연과학)은 오늘의 학설이다.”라 하여, 도학적 전통으로부터 근대적 신학문으로 전환을 밝히고 있다.
(4) 서양철학의 도입
유길준(兪吉濬)은 진화론을 한국에 소개한 개화파 초기 인물이다.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철학의 개념을 "지혜를 애호하여 이치를 통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여 소개하였다.
도학의 학풍 속에서도 이정직(李定稷)은 『연석산방고(燕石山房稿)』 의 「칸트철학대략(康氏哲學大略)」을 통해 칸트(Kant,I.)의 철학을 매우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는 칸트의 자유사상을 천리(天理)의 자연에 따르는 것이라 해석하며, 이 자유를 유학의 본연지성과 일치시켰다.
또한 “사람은 목적으로만 대하고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을 인(仁)의 경지라 하고, 나아가 “칸트야말로 동양 유학의 화신(化身)이 서양에 태어난 것.”이라 하여, 칸트에게서 동서철학의 일치성을 발견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인재(李寅梓)는 성리학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로써 다양한 민심(民心)을 통합하는 헌법(憲法)의 의미를 해석하였다.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을 저술하여, 희랍철학에서 서양 근세철학사를 일별하면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를 가장 탁월한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이정직과 이인재는 우리나라의 유학자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서양철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5) 동학(東學)과 정역(正易)
19세기 후반에는 조선왕조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사회 저변층이 심하게 동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도 민중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종교운동이 일어나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최제우(崔濟愚)가 일으킨 동학이다. 동학은 1894년 민중혁명을 일으켰으며,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종교로도 성장하였다. 동학(뒤에 天道敎로 개명)은 “하느님을 모신다[侍天主].”고 하여 나의 속에 내재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고, 또한 “사람 섬기기를 하느님 섬기듯이 하라(事人如天).”하여 타인에 내재한 하느님을 인식하게 하여, 인간에 대한 존중의식[곧 인간존엄성]을 극대화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人乃天]).”라 하여, 하늘 속에서 인간의 일치를 확인하는 기본 교리를 통해 인간과 하늘의 일치와 나와 남의 일치에 따른 인간 존중 사상을 고양시켰다.
김항(金恒)의 『정역(正易)』은 『역』의 팔괘도(八卦圖)를 변혁하여 기존의 차별적 세계(抑陰尊陽)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평등 · 조화의 새로운 세계(調陽律陰)를 후천(後天)이라 대비시켜, 우주 질서의 전환 형식으로 역사의 전환 국면을 밝혀주고 있다.
(6) 애국계몽사상과 유교개혁론
개화사상이 대중교육의 필요성을 각성시켜가고 있는 가운데 국권(國權)을 상실할 역경에 처하자, 박은식(朴殷植) · 장지연(張志淵) · 신채호(申采浩)로 대표되는 애국계몽사상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언론활동과 역사 연구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 량치차오(梁啓超)의 계몽사상을 광범하게 소개하여 서양 근대의 다양한 문물과 사상을 전파하였다.
도학파에서도 개혁의식을 지닌 인물들은 은둔의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유교사상의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박은식은 유림의 폐단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나아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저술하여 인민 사회를 지향하고, 적극적으로 포교하며, 간결한 가르침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여 양명학의 입장에서 유교 개혁을 추구하였다.
장지연은 유교의 기본 성격으로 진화주의 · 평등주의 · 겸선(兼善)주의 · 강립(强立)주의 · 박포(博包)주의 · 지성(至誠)주의를 표방하면서 근대적 유교이념을 재해석하였다.
이병헌(李炳憲)은 캉유웨이(康有爲)의 금문경학(今文經學)과 공교(孔敎)운동의 영향을 받아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을 통해 유교 개혁이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양철학의 지식을 섭취하여 종교와 철학의 일치성을 추구한 「종교철학합일론(宗敎哲學合一論)」을 저술하고, 유교로서 종교와 철학을 통합하는 체계를 추구하여 「유교위종교철학집중론(儒敎爲宗敎哲學集中論)」을 제시하였다.
(7) 불교의 개혁사상
불교에서도 백용성(白龍城) · 박한영(朴漢永)은 불교이념의 새로운 각성과 교단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특히 한용운(韓龍雲)은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을 통해 불교의 현대적 개혁을 가장 과감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교단의 행정조직과 사원 운영방법을 혁신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의 독신제도 폐기, 청년운동과 경전의 국역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적 주장은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을 인식하고 불교의 시대적 적응을 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교리적 근거를 재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교와 선의 일치를 새로운 불교의 방향이라 하였다. 나아가 참된 자아(眞我)를 의미하는 ‘진여(眞如)’와 현상적 자아(現象我)를 의미하는 ‘무명(無明)’을 대립시켜서, 불교는 무명을 극복하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철학적 종교임을 지적하였다.
(8) 도교의 개혁사상
전병훈(全秉薰)은 유 · 불 · 도 3교와 서양철학의 여러 분야를 종합하여, 심리철학 · 도덕철학 · 정치철학에서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일관된 철학 체계를 추구하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을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 발견된 『천부경(天符經)』을 첫머리로 삼아, 한국사상에서 철학적 사유의 원형을 확인하여 민족철학으로 승화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도교를 종래의 외단(外丹)은 물론 내단(內丹)의 이론도 개인의 화선(化仙)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서 사회적 대중 구원으로 승화시킬 것을 도모하였다. 또한, 그는 칸트의 세계정부론 · 영구평화론를 극찬하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통일공화정부(世界統一共和政府)’의 체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3.3.4. 현대의 한국철학
오늘날 한국철학이 놓인 상황은 유교 · 불교 ·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배경의 전통철학과 더불어 서양철학이 양립하거나 복합되어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남북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뉘어져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철학에 대한 봉쇄에서 상당히 개방적인 이해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동서의 철학과 남북의 이념 사이에 대립과 이질성을 극복하여 조화를 실현하는 것이 절실한 당면과제이다. 동시에 사회 안에서도 물질적 가치의식과 정신적 가치의식 사이에 불균형 · 부조화가 심화되어 우리 시대를 이끌어갈 가치관의 모형을 찾아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문제를 밝히고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탐구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앞으로 한국철학의 창조적 업적을 산출할 수 있는 모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