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다는 이론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고, 다르다는 이론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조선시대에 이로 인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전자의 인물성동론을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후자의 인물성이론을 호론(湖論)이라 하였다.
송대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즉리(性卽理)와 이동기이(理同氣異)를 통해 보면, 이 때의 성은 같은 것으로 곧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것을 적용하면 인간과 인간의 본연지성은 같고 기질지성은 다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인간 이외의 만물에까지 이것을 적용하면 인간과 동물이 과연 본연지성으로서는 같고, 기질지성만이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동물도 기질을 변화시키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이 인간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때 박세당(朴世堂)은 ≪중용≫ 경1장(經一章)의 주희(朱熹) 주(註)에서 인간과 만물을 겸해서 말한 것은 ≪중용≫의 뜻이 아니라고 하여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인물성동이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678년(숙종 4) 김창협(金昌協)이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한다.
그는 ≪맹자≫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에서 주자가 “이(理)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품수가 어찌 물(物)이 얻은 바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중용≫에서 주희가 말한 “인과 물이 각각 품부된 이를 얻어서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이 되었다.”고 한 말과는 서로 다르나 성에 편전(偏全)의 다름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은 자세하지가 않다.
같은 해에 권상유(權尙游)가 박세채(朴世采)에게 주희의 ≪태극도설해 太極圖說解≫ 가운데 “혼연한 태극의 전체가 일물(一物) 속에 각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말에 의심을 품고 인물의 성은 편전이 없을 수가 없으니 어찌하여 전체를 각기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하였으나 대답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그의 형인 권상하(權尙夏)에게 다시 질문했을 때 권상하는 “그 이를 말하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성을 말하면 편전이 있다.”라고 하였다.
특히, 이이(李珥)의 “인간의 성이 물(物)의 성이 아닌 것은 기의 국한성 때문이고, 인간의 이가 곧 물의 이인 것은 이의 통일성(通一性) 때문이다.”와, 주자의 “이가 같다고 한다면 옳으나, 성이 같다고 한다면 옳지 않다.”를 인용하여 인간과 물의 성을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 뒤로 권상하 문하에서 인물성의 동이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일어난 논변이 중심을 이룬다.
권상하의 이론(異論)을 계승한 한원진은 성에 삼층의 다름이 있다고 하여 성삼층설(性三層說)을 주장한다. 첫째가 인간과 동물이 모두 같은 성이고, 둘째가 인간과 동물의 성이 같지 않으나 인간과 인간의 성은 모두 같은 성이며, 셋째가 인간과 인간이 모두 같지 않은 성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에 세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모두 한 가지 성이지만 오로지 이만을 말하고 기에 미치지 않는 것으로 초형기(超形氣)로서 제1층이고, 각각 기의 이만을 가리켜서 그 기에 혼잡되지 않은 것을 말하여 인기질(因氣質)로서 제2층이며,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즉 제3층으로서 잡기질(雜氣質)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구별한 세 가지 성 중에서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성은 곧 제2층으로서의 성을 말한다.
또한 성과 이 개념의 부동(不同)을 주장해서 성의 실체는 이가 아니나 성의 명의(名義:개념)는 기에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즉이리는 성의 개념을 말한 것이 아니고 성의 실체만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성즉리지재기(性卽理之在氣)’라 하여 ‘재기(在氣)’라는 말을 덧붙여야 된다고 한다. 성은 분명히 이이지만 기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주자의 ‘인물미생시지가위지리설성부득(人物未生時只可謂之理說性不得)’에서 성과 이가 같은 개념이라고 한다면 ‘성’ 자와 ‘이’ 자를 바꾸어도 말이 되겠느냐고 하여 성 개념과 이 개념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물(人物)의 성은 다르나 인물의 이는 같다고 한다.
이때의 ‘성’ 자와 ‘이’ 자는 호환(互換)과 대거(對擧)로 설명되는데, ‘성’ 자와 ‘이’ 자를 구별할 때는 대거로써 말해지며, 주자의 “이는 차별이 없다. ……성에는 전(全)과 부전(不全)의 다름이 있다.” 등으로 표현되나 성즉리이므로 ‘성’ 자와 ‘이’ 자를 호환하여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주자의 ‘이유편전(理有偏全)’·‘이절부동(理絶不同)’은 성을 이로 호환한 것이고 ‘천하무성외지물(天下無性外之物)’·‘성즉태극지전체(性卽太極之全體)’는 이를 성으로 호환한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다고 해서 성과 이의 개념이 동일한 것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성은 성리학에서 일원분수(一原分殊)의 이론에 비추어 보아 제2층의 성으로, 제1층의 이와 대거한 성은 곧 오상(五常:仁義禮智信)으로서 일원(一原)의 이가 아니고 분수의 이라고 한다. 일원은 글자 그대로 하나로서 둘이 아니라고 하여 분수(分殊)를 이체(異體)로 보아 하나 아닌 둘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희의 ‘이유편전’과 ‘이절부동’은 분수의 이로, 이것이 바로 성 즉 오상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분수는 기와 혼잡되어 있는 분수가 아닌 것으로, 이이의 ‘기국(氣局)’으로서의 성을 말하고 있다.
즉, 기국의 이라는 것이다. 기에 국한된 이이기 때문에 일원의 이가 아닌 분수의 이인 것으로, 인과 물이 태어난 순간 이체로서 기의 편전으로 인한 성의 편전으로서의 인물(人物) 부동의 성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때의 성은 본연(本然)으로서 인물이 부동이지만 모두 다 선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선악(有善惡)으로서의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제3층의 잡기질로 말해지며 기질의 변화를 통해서 본연지성을 회복할 수 있으나, 개는 개의 본성을 회복하고 소는 소의 본성을 회복하며 인간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지, 본성이라고 하여 모두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물성부동론을 단순히 기질지성의 부동으로만 이해한다면 기질지성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이론에 따라 당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논의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간은 성에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있는데, 본연지성으로 말하면 도둑의 성이나 순(舜)의 성이 같을 뿐만 아니라 물(物)의 성이 곧 인간의 성이라고 하고, 기질지성으로 말하면 개의 성이 소의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둑의 성도 순의 성과 같지 않다고 한다.
한원진이 말한 제2층의 성은 본연지성이 아니라 기질지성으로서 당연히 다른 것이지만, 기질지성에서 이만을 단지(單指)한 본연지성은 인간과 동물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같은 것은 모두 본연이고, 다른 것은 모두 기질뿐이라는 것이다.
이 때의 본연은 한원진의 초형기(超形氣), 즉 제1층의 성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한원진의 제2층으로서의 성을 부정하고 제2층과 제3층을 모두 기질지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맹자≫ 생지위성장에 나오는 성은 기질지성으로 이해하여 당연히 다른 것이고, ≪중용≫의 천명지성(天命之性)이 바로 본연지성으로서 하늘이 부여해 준 성은 인간과 동물이 모두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을 해석하여 천지만물이 기국이고 천지만물의 이가 이통(理通)으로, 이 이가 바로 본연지성으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즉리의 명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이가 말한 “인간의 성이 물(物)의 성이 아닌 것은 기의 국한성 때문이다.”에서 인성·물성은 본연지성이 아니고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희가 말한 ‘이동(理同)’·‘성부동(性不同)’도 같은 것으로서의 이는 본연지성을 가리키고 다른 것으로서의 성은 기질지성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므로 오상은 곧 본연지성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기질의 통색(通塞)이나 편전이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오상임에는 틀림없으므로 모두 오상을 가지고 있다는 동시오상(同是五常)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다만, 인간의 기질은 정통(正通)하므로 능히 발용(發用)할 수 있고, 동물의 기질은 편색(偏塞)하므로 발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원진이 이와 성 개념을 구별하여 성을 분수로 인식한 것과는 달리, 이간은 성을 일원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천명이나 오상이 모두 본연으로서의 성이며, 이 때의 성은 모두 이이고 곧 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동차일원설(同此一原說)로, 비록 명목이 많으나 이 이의 이명(異名)으로서 피차(彼此)·본말(本末)·대소(大小)의 다름이 없는 일물(一物)로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통’·‘이동’·‘본연’·‘천명’·‘오상’이 모두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이만을 단지한 본연지성으로서 일원이고, ‘기국’·‘성부동’·‘기질’은 이와 기를 겸지(兼指)한 기질지성으로서 이체·부동한 분수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본연이 아니고 기질의 차이이므로 오직 같은 것은 본연으로 선한 것이고, 같지 아니한 것은 기질로서 유선악이다. 이것을 대분(大分)과 세분(細分)의 논리로써 전개시키고 있다.
오상의 대분과 세분을 알아보면, 이와 기가 혼융(混融), 무간(無間)하나 이만을 단지한즉 같은 것이 이와 같고 기까지 겸지하면 다른 것이 저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상은 단지한 이이므로, 이 때 단지와 겸지를 대분하면 단지로서 인간과 동물의 성, 즉 오상이 같은 것으로, 이것이 곧 오상의 대분이다.
물론 본연으로서의 선과 유선악으로서의 기질을 대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이 모두 이와 기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겸지한 것은 유선악의 기질지성이다. 여기에서 세분하면, 인간과 동물의 나뉨은 다만 정편통색을 다투고, 성인과 범인의 구별은 다만 혼명강약(昏明强弱)을 다투는 것으로, 이것이 오상의 세분이다.
한원진이 편전으로서의 오상이 본연으로서 인간과 동물이 성이 다르다고 한 데 비해, 이간은 편전은 오상이 아닌 기질로서 인간과 동물이 다르고 본연인 오상으로서 인간과 동물의 성은 같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