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집(寒洲集)』 권32 잡저에 실려 있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원위(原委: 근본과 말단을 의미함)를 밝히고자 쓴 글이다.
이진상 이전에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변에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두 가지가 서로 대립되어 왔다. 이진상은 이이의 설을 부정하고 이황의 설을 따랐으나 그것은 다만 호발(互發)일 뿐 각발(各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런 것이지, 진정으로 호발설을 좇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호발보다는 이발(理發)만을 주장한다. “기의 생도 이에 근본한다(氣之生, 本於理).”고 하여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이발이라고 한다.
『중용』에서 말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은 모두 이미 발한 이(已發之理)로 설명해, 성(性)이 발한 것으로, 하나의 이(一理)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과 정의 실상은 다만 이발만 있고 기발은 없다고 한다. 이는 발하는 것의 주(所發之主)이고 기는 발하는 것의 자(所發之資)이므로 기가 스스로 발해 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단 뿐 아니라 칠정도 이발이라는 주장은 칠정도 사단이 없을 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의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다(生亦我所欲, 死亦我所惡).”는 칠정을 말한 것이나,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舍生取義).”는 것은 바로 사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단이라고 반드시 선(善)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이발이라고 칠정이 모두 선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한 것은 이의 실(理之實)이고 악한 것은 이의 반(理之反)이라 하여,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발할 때의 처음에는 모두 이발로서 선이나, 발의 재료[資]인 기가 이를 순종하지 않으면 악이 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