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아버지는 이현일(李玄逸)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경력 박늑(朴玏)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이휘일(李徽逸)과 이숭일(李嵩逸)에게 배웠다.
아버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따라가서 시봉하였고, 1700년(숙종 26) 유배에서 풀려나자 안동군 금수(錦水)에서 살았다. 벼슬은 주부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여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이재는 주리론(主理論)으로 영남학파를 이끌었으며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는 태극(太極)에 동정(動靜)이 있어서 음양이 나뉘고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하고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나고 영묘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될만한 묘법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대개 이기란 이물(二物)인데 상리(相離)하지도 않고 상잡(相雜)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이것을 나누어 둘이 되게 할 수도 없고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1704년 정시한(丁時翰)의 은거지 법천우사(法泉寓舍)로 가서 이기사칠지변(理氣四七之辨)·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인물품수지동이(人物稟受之同異)를 강론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절필한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하였다.
『성유록(聖喩錄)』·『금수기문(錦水記聞)』·『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안증전서(顔曾全書)』·『주어요략(朱語要略)』 등을 저술하였다. 이재의 대표적 제자로는 이상정(李象靖)·이광정(李光靖)이 있다. 저서로는 『밀암문집(密菴文集)』 25권 1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