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다만 이만채(李晩采) 편저의 『벽위편(闢衛編)』 제1권 14면에서 47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서학변」의 전부인지 혹은 발췌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는 17세기 초부터 한역(漢譯) 서학서가 주로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 들어왔다. 신후담은 이 글에서 이렇게 전래된 삼비아시(Sambiasi, F., 畢方濟)의 『영언여작(靈言蠡勺)』과 리치(Ricci, M.,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대해 장문의 논평을 했다.
『천주실의』에 대해서는 천지창조설 등을 일일이 논박했으며, 『영언여작』에 대해서는 서학에서 주장하는 영혼의 자립성과 불멸성을 일축하고 있다. 『벽위편』에는 이 글의 저작연대가 신후담이 23세 때인 1724년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깊이있는 논평 내용으로 보아 원숙기에 쓴 후기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