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라우렌시오.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鴻山) 출신.
만주에서 한국 입국준비를 하며 한국인신학생 양성을 선교사업의 하나로 계획하였던 주교 리델(Ridel)과 신부 로베르(Robert) 등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1877년 한국 입국에 성공하자 곧 신학생 교육에 착수, 신학생을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한편, 한국정부의 천주교탄압이 약화되면서부터는 국내의 신학생 교육과 병행하여 일부 신학생들을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으로 유학시켰는데, 1882년에서 1884년까지 유학생수는 21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 제일 먼저 페낭으로 유학간 사람이 강성삼이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건너가 신부 코스트(Coste, 高宜善)의 지도로 1년간 예비신학교육을 받은 뒤 페낭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기후와 풍토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1884년부터는 신학생의 파견을 중단하고 유학중에 있는 신학생들도 철수시키기로 한 교구의 결정에 따라, 1890년에 귀국하여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藥峴聖堂 : 지금의 중림동성당)에서 강도영(姜道永)·정규하(鄭圭夏)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서품된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뒤 곧바로 임지인 부산절영도(絶影島)로 내려갔고, 1898년 1월에 경상남도 밀양군 하남면 명례리로 옮겨갔으며, 그 뒤 6년간 양산·언양·진양 등 14개 공소를 돌아다니며 전교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