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습록논변」은 조선 전기 문신·학자인 이황이 왕수인의 『전습록』을 읽고 그 중심 문제에 대해 주자학적 입장에서 논술한 유학서이다. 이황은 왕수인이 어긋난 학술로 장황하게 사람들을 현혹하여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규정하고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황의 「전습록논변」은 조선 후기 유학계에 양명학이 발생·성장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양명학을 수용한 정제두는 이황의 「전습록논변」의 논리를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전습록』 가운데 권1의 몇 조목만 비판했다는 점에서 『전습록』 3권의 전체를 체계적으로 논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퇴계집』 권41 잡저에 실려 있다. 저술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연보에 의하면 그가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던 66세(1566) 이전에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은 『전습록』 가운데 왕수인의 제자인 서애(徐愛)가 기록한 권1의 첫머리에서 몇 조목만 인용하면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가 『전습록』 3권의 전체를 체계적으로 논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습록』에서 인용한 구절을 ① 『대학』의 3강령 가운데 ‘재친민(在親民)’에서 정자(程子) · 주자(朱子)가 ‘친(親)’자를 ‘신(新)’자로 고쳤지만 왕수인은 ‘친’자가 옳다고 주장한 점, ②왕수인이 사물에서 이(理)를 구하는 것을 부정하고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한 점, ③사물에서 당위적인 의절(儀節)을 구하는 것을 배우[扮戲子]에 비유하여 비판하는 점, ④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는 점 등 4단으로 나누고, 각 단의 내용을 비판해가고 있다. 이 조목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양명학(陽明學)의 핵심 문제들 가운데 격물설(格物說) · 치양지(致良知)의 문제가 빠져있음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왕수인은 『대학』의 ‘재친민’의 ‘친’자를 ‘신’자로 고친 것을 비판해, 친애한다는 뜻에는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백성을 새롭게 하여 깨닫게 하는 뜻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황은 밝은 덕을 밝히는 것(明明德)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을 『대학』의 일관된 단계임을 지적해, 밝히는 것(明)이나 새롭게 하는 것(新)이 배움[學]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여, 왕수인이 말하는 ‘기른다’ · ‘친애한다’는 뜻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관련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라 강조한다.
둘째, 왕수인은 심즉리설의 입장에서 천하에는 마음을 떠나서 일도 없고 물도 없다고 언명하였다. 왕수인은 사물의 객관적 이치를 부정하므로, 궁리는 본심을 밝히는 것이요, 이 마음이 천리와 일치하면 도리를 실천하게 될 것이라 본다. 이에 대해 이황은 왕수인이 궁리 공부의 문제를 실천공효의 문제로 돌려놓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셋째, 왕수인은 따뜻하게 하고 서늘하게 하는 절목이나 봉양의 마땅한 의절은 하루 이틀이면 모두 터득할 수 있는 것으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마음의 순수함이 없는 의절은 배워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심학적 입장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이황은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고 외형의 의절만 강구하는 자는 배우와 다름이 없다 하여 왕수인의 지적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황은 여기서 더 나아가 백성의 떳떳한 본성과 사물의 법칙이라는 주관과 객관에 모두 하늘의 참마음이 있는 것이며, 진리의 세계는 주 · 객의 분리를 넘어 내 · 외가 융철함으로써 성의 · 정심 · 수신에서 제가 · 치국 · 평천하에까지 확대되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주 · 객 종합의 입장에서 유심론적 체계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양명학이 불교, 특히 선학(禪學)에 접근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넷째, 왕수인은 『대학』의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하듯이,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고 보고, 이때 지와 행의 작용이 동시적인 것으로 보아 지행합일설의 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황은 인심(人心)의 발현이 형기(形氣)에서 오는 것은 지와 행이 일치하지만, 의리(義理)에서 오는 것은 지와 행이 일치할 수 없다고 분석함으로써, 왕수인이 형기의 세계로 의리의 세계를 해명하는 데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황은 왕수인을 치우치고 어긋난 학술, 억세고 비뚤어진 마음, 장황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변론을 지녔으며,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규정하고 철저히 이단으로 배척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양명학의 전파 초기에 이를 철저히 비판함으로써 그의 주자학적 입장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를 보여주었고, 후기 유학계에 양명학이 발생 · 성장하는 데 그 근원에서부터 막는 구실을 해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정제두(鄭齊斗)는 「전습록논변」을 통한 이황의 양명학에 대한 비판 논리를 반박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