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철종 3) 이항로의 명에 의해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수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지원(至元) 25년까지만 편수하고, 그 뒤는 유중교의 선조 유청신(柳淸臣)과 관계된 기사가 있는 관계로 김평묵이 완성하였다.
1876년(고종 13)과 1882년에는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과 사헌부지평에 각각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881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을 다녀와서 미국과 연합하고 서양의 기술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책을 세우자, 유중교는 김평묵과 함께 척사위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대해 김평묵에게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냄으로써 사칠논쟁(四七論爭)이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버금가는 대논쟁이 이항로 문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즉 유중교는 심(心)을 기(氣)로 규정하고 이항로 및 김평묵은 심을 이(理)로 규정함으로써, 스승의 설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인들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88년에는 두 설을 절충해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잠정적으로 심설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유중교의 임종 직전에 문인들에게 정안(正案)의 문자(文字)는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과 도리에 모두 맞지 않는다.’ 하여 거두어들일 것을 명함으로써 결국 두 설은 합일을 보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유중교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자양금조후사(紫陽琴調候詞)」 · 「옥계조(玉溪操)」 · 「현가궤범(絃歌軌範)」 등을 저술하였다. 유중교는 특히 공자가 도(道)를 가르치는 데에는 악(樂)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고악(古樂)은 이미 없어지고 속악(俗樂)은 법(法)이 없어, 도를 배우는 이가 거문고 등에 종사하고자 해도 시작할 터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저서로는 『성재문집(省齋文集)』 60권이 있다.
제학에 추증되었고, 고산(高山)의 삼현서원(三賢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