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논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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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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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
내용

호락 시비 혹은 인물성 동이 논쟁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物性)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人物性)의 동(同)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권상하·한원진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그러나 권상하는 더 이상의 논변은 무익하다고 생각, 한원진에게 중지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한원진과 이간의 사이에는 두 차례의 왕복 논변을 끝으로 직접적인 논변은 없었지만 서로의 주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간의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낙하(洛下 : 지금의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불리게 되었고,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호서(湖西 : 지금의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호학(湖學) 또는 호론(湖論)이라 칭하게 되었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은 대개 《중용》 경(經) 1장의 주희(朱熹) 주(註)의 “사람과 물(物)이 각각 그 부여된 바의 이(理)를 얻어서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이 되었다.”에 근거해 인과 물이 모두 균등하게 오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은 대개 《맹자》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주의 “이(理)로써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품수(禀受)가 어찌 물(物)이 얻은 바가 전(全)하리오?”에 근거해 사람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었지만 물(物)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의 두 구절뿐만이 아니고 인물성의 동이에 관해 주희는 여러 군데에서 어떤 때에는 인물성의 동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인물성의 이를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은 〈답서원빙서 答徐元聘書〉에서 “사람과 물(物)의 성(性)은 본래 같지 않을 수가 없다. 기품(氣禀)은 다름이 없을 수가 없다. ······성(性)은 같고 기(氣)는 다르다.”와 〈답황상백서 答黃商伯書〉에서 “만물의 일원(一原)을 논하면 이는 같고 기는 다르다. 만물의 이체(異體)를 보면 기는 서로 가까우나, 이는 절대로 같지 않다. ······이가 다른 것은 편전(偏全)이 혹 다르다는 것이다.”다.

호론과 낙론은 주희의 위 네 가지 설(說) 가운데 두 가지씩을 중심적으로 자기의 설의 근거로 삼으면서도 모두가 다 나머지 두 가지 설도 모두 자기의 설에 합치되는 것으로 해석해 자기의 주장을 펴고 있다.

낙론은 성동기이(性同氣異)·이동기이(理同氣異)를 공안(公案)으로 삼아 인과 물의 성과 이는 같고 기가 다르다고 하면서 성즉리(性卽理), 이즉성(理卽性)로서 성과 이는 같은 개념으로 본다.

맹자가 인성(人性)·우성(牛性)·마성(馬性)을 다르다고 한 것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말한 것이고 주자가 주석한 이유편전(理有偏全)도 분수(分殊)의 이로서 발용(發用) 후의 기질지성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인과 물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같으며 기질지성이 다르다고 한다.

호론은 이절부동(理節不同)·이유편전을 공안으로 삼아 이때의 이는 일원(一原)의 이가 아닌 분수의 이라면서, 이 때문에 바로 성으로서 성즉리는 되나 이즉성은 안되며 성과 이의 개념은 같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과 물이 같은 것은 일원의 이고, 기뿐만이 아니라 분수의 이인 성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용》에서 말한 ‘천명지성(天命之性)’으로, 주희가 주석한 각자(各字)는 본래 타고 날 때에 각각 다르게 성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 성은 기질지성이 아닌 본연지성을 말하고 있고, 주희의 성동기이는 초년미정지론(初年未定之論)으로서 그 자신이 이미 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뒤 계속된 호락 논쟁은 사제(師弟) 관계를 떠나서 호론과 낙론으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는 학술적 논쟁을 넘어서서 학파 또는 당파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 논쟁은 그 뒤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대부분이 양론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되었으나 임성주(任聖周)와 기정진(奇正鎭)은 양론을 모두 비판해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려 하였다.

모두 인물성 동이 논쟁의 새로운 극복으로서 조선 후기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으나, 역시 호락 논쟁을 비판하는 데에서 출발한 점에서 호락 논쟁이 후기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호락 논쟁은 경전 해석에 따른 무의미한 학술 토론으로서 현실 사회에는 무익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당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계속적인 남북의 외환(外患)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정치·경제상의 피폐와 궁핍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문화상의 혼란과 무질서도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전의 성리학이나 주자학 체계로는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데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인물성 동이에 관한 호락 논쟁은 당시 땅에 떨어진 도덕 의식 및 인간의 주체성을 세우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한국유학사』(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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