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3년 태조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박술희(朴述希)에게 전해 후세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왕실의 헌장으로 태조의 신앙·사상·정책·규범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 26년 4월조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년 동월조에 있으며, 이는 당시의 실제 상황을 기록한 『고려실록』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훈요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서(信書)이며 뒷부분은 본론격인 10조의 훈요이다.
「훈요십조」전체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순(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요(堯)의 양위를 받았고, 한(漢) 고조(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의 왕업을 이룩하였다. 나도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 잘못 추대되어,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마음과 몸을 몹시 고달피 해가면서 19년 만에 국내를 통일하고, 즉위 25년(훈요를 친히 지은 해)에 몸은 이미 늙었다. 행여나 후사들이 방탕하여 기강을 문란하게 할까 두려워하여 훈요를 지어 전하노니, 조석으로 읽어 길이 귀감으로 삼으라.”
「훈요십조」의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훈요1조: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② 훈요2조: 신설한 사원은 (신라 말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즉『도선비기(道詵秘記)』에 점쳐놓은 산수순역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는 뜻).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③ 훈요3조: 왕위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중망을 받는 자에게 대통을 잇게 하라.
④ 훈요4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唐)의 풍속을 숭상해 예악문물(禮樂文物)을 모두 거기에 좇고 있으나, 풍토와 인성(人性)이 다르므로 반드시 같이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거란(契丹)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
⑤ 훈요5조: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서경(西京: 평양)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 子·午·卯·酉가 있는 해)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안녕(태평)을 이루게 하라.
⑥ 훈요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⑦ 훈요7조: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그 요체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있으니, 간언을 좇으면 어진 임금이 되고, 참소가 비록 꿀과 같이 달지라도 이를 믿지 아니하면 참소는 그칠 것이다. 또,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려 하고 용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연히 민심을 얻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이다. 옛말에 “향긋한 미끼에는 반드시 고기가 매달리고, 후한 포상에는 좋은 장수가 생기며, 활을 벌리는 곳에는 새가 피하고, 인애를 베푸는 곳에는 양민이 있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상벌이 공평하면 음양도 고를 것이다.
⑧ 훈요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⑨ 훈요9조: 무릇 신료들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정할 것이고 함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또 고전에 말하기를 “녹은 성적으로써 하고 임관은 사정으로써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공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과 가까운 자에게 까닭 없이 녹을 받게 하면 백성들의 원성뿐만 아니라 그 사람 역시 복록을 오래 누리지 못할 것이니 극히 경계해야 한다. 또 이웃에 강폭한 나라가 있으면 편안한 때에도 위급을 잊어서는 안 되며, 항상 병졸을 사랑하고 애달피 여겨 요역을 면하게 하고, 매년 추기(秋期) 사열(査閱) 때에는 용맹한 자에게 마땅히 (계급을) 승진시킬지어다.
⑩ 훈요10조: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해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주공(周公)과 같은 대성도「무일(無逸)」(안일, 방심하지 말라는 글) 1편을 지어 성왕(成王)에게 바쳤으니, 이를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철학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나타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제1·2조는 사찰의 남조(濫造)에 따른 양적 확대를 경계한 조항이다. 특히 제2조의 전반부는 제1·2조에서 지적한 폐단에 대해 대응책을 제시한 것으로, 『도선비기』에서 산수의 순역에 따라 점쳐놓은 지역에만 사원을 건조하라는 내용이다.
제3조는 고려왕실의 왕위계승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에서는 대개 이 방법이 준수되었다. 제4조는 태조의 대외국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태조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조항이다. 제5조는 태조의 도참사상(圖讖思想)과 함께 그가 서경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제6조에서는 사람과 신이 동락하는 국풍이라 할 수 있는 연등회·팔관회를 경건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7조는 중국의 고전철학을 인용한 말이며, 제8조는 왕실의 비밀훈계로서 일반 신민에게 공개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제9조는 녹봉과 임관에 관한 내용과 국방안보에 관한 훈계이며, 제10조는 태조의 유교주의적 정치철학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훈요십조」의 각 조항에는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 마음에 간직하라)’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훈요십조」는 하루 아침에 지은 것이 아니라 태조가 평소에 틈틈이 기록해 두었던 것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훈요십조」는 발견 경위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즉 일본인 학자 가운데 이마니시 류[今西龍]등이「훈요십조」가 후세 사람의 위조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려사』 최제안전(崔齊顔傳)에 의하면, “신서와 훈요는 병란(兵亂)에 분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이미 죽은 최항(崔沆)의 집에서 얻어 바침으로써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병란’이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권신 강조(康兆)의 난(1009) 아니면, 그 이듬해(1010)에 개경까지 쳐들어온 거란 성종의 침입을 의미하는 것 같다. 특히 후자의 병란 때에는 개경의 궁궐과 여러 중요 건물이 불타버렸고『사기』등 문헌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몇 년 뒤인 1013년(현종 4)에 사국(史局)을 열고 최항과 김심언(金審言) 등에게 명해 국사[實錄]를 편수하게 하였다. 편찬 도중 최항은 1024년에 죽고, 덕종 때에 이르러 황주량(黃周亮) 등에 의해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 7대의 실록이 완성되었다. 이때가 대개 1034년(덕종 3)경이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최제안이 왜 최항의 집에 갔으며, 또 최항은 어떠한 경로로신서·훈요를 소장하게 되었는가는 검토할 문제이다. 최제안은 대유학자 최승로(崔承老)의 손자로, 역대에 벼슬한 중신인데, 아마 최항 사후에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고 사료를 채집하기 위해 최항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항이 소장한 그것은 궁중비전(宮中秘傳)의 헌장이므로, 부본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원본을 사장(私藏)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있다.
우선, 최항이 목종에게 직접「훈요십조」원본을 받았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이병도). 최항은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아우인 최언위(崔彦撝)의 손자로서, 성종·목종·현종 3대에 걸쳐 벼슬한 근신이다. 권신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울 때 목종이 신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궁에서 쫓겨나 시골로 내려가자, 최항은 목종을 시종하였다. 이때 목종은 최항에게 “이 변란이 모두 나의 부덕한 소치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다만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 하니, 그대는 아무쪼록 새 임금에게 말을 전하고 또 그를 잘 보필하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종은 도중에 강조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되었다. 이 때 목종이 궁중에서 지니고 나온 태조의 신서·훈요를 최항에게 맡겨 신왕에게 전하도록 한 것을 그가 사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이전부터 최항의 집에 대대로 전해오던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김상기). 이는 최언위가 태조의 사부 역할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가 태조의 훈요 내용을 미리 알아 집에 베껴두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지막으로 최항이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의 침입 시 피난을 가면서 궁중의 기밀문서를 집에 보관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김성준). 최항은 현종이 즉위하자 그의 사부가 되었는데, 거란 침입 때 현종이 피난을 가자 그가 궁중을 살펴보다 옛 문서를 집으로 가져가 보관하였고, 이후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7대 실록의 편찬책임을 맡았을 때 수사관 최제안을 시켜 집안의 문서를 정리하던 중「훈요십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한편,「훈요십조」가운데 제8조가 조작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마니시 류는 태조대에 후백제 출신들이 많이 등용된 것을 근거로 제8조항이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국내 학자들은 후백제 지역 사람들이 태조 때부터 별다른 차별 없이 등용되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에 제8조항의 내용은 그 일부가 조작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8조에서 말하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외(外)’를 원문 그대로 인정하여 차현 이남, 공주강 밖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지역적 범위에 대해 후백제 전체 지역으로 보는 견해, 후백제 중심지였던 전주 권역으로 보는 견해, 후백제와는 무관한 공주·청주 일대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