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때 홀로 서울에 다시 올라와 조숙(베드로) · 권천례(데레사) 부부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1816년 동지사(冬至使) 통역관의 하인이 되어 북경에 들어가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뒤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을 내왕하면서 꾸준히 청원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824년 이후에는 유진길과 조신철(趙信喆)이 이 일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1825년에 유진길 등과 연명으로 로마 교황에게 직접 청원문을 올려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리는 동시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청원문은 1827년 교황청에 접수되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교구의 설정이 선포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Bruguiere,B.) 주교가 임명되었다.
이후 1834년 1월에는 유방제(劉方濟, 즉 여항덕)신부를 서울로 잠입시켰고, 1836년에는 모방(Maubant,P.P.) 신부를, 1837년에는 샤스탕(Chastan,J.H.) 신부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L.M.J.) 주교를 맞아들임으로써 조선교회는 비로소 명실상부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하상은 이때부터 주교 밑에서 전교활동을 도와 교회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리고 1838년경에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앵베르 주교는 3년 안에 정하상 등에게 신품(神品)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정하상도 7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고 9월 22일 순교하여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체포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해 두었다가 체포된 다음 관헌에게 제출하여 천주교의 도리를 밝혀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925년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시성(諡聖)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