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삼 ()

남종삼 필적
남종삼 필적
천주교
인물
조선후기 홍문관교리 · 영해현감 · 승지 등을 역임한 순교자.
이칭
증오(曾五)
연파(煙波), 중재(重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7년(순조 17)
사망 연도
1866년(고종 3)
본관
의령(宜寧)
주요 관직
홍문관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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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홍문관교리 · 영해현감 · 승지 등을 역임한 순교자.
개설

세례명 요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齋).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큰집인 남상교(南尙敎)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제천에 거주하며 남인계의 농학자로 충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남상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생애 및 활동사항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 영해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承旨)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또한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이 컸는데,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에는 이유일(李惟一)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입교 후에는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관여했고,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종 말에 이르러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점차 미묘해져 가는 가운데 만주(滿洲)의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통상을 요구하며 자주 국경을 넘어오므로, 조정은 위기감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사태해결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 이유일 · 김면호(金勉浩) 등 교인들과 상의하여, 국내에서 전교 중인 베르뇌 · 다블뤼(Daveluy) 등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영국 ·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남종삼은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남침을 막는 동시에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도 구현케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방아책에 대하여 당초 관심을 가졌던 대원군이 주교 베르뇌 · 다블뤼와의 면담이 서울에 부재중인 관계로 지연되는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북경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는 와전된 정보가 전해지자, 천주교 접근에서 천주교 박해로 돌변하여 1866년 초에 천주교도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종삼도 3월 1일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된 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참고문헌

『병인사학죄인종삼봉주등국안(丙寅邪學罪人鍾三鳳周等鞫案)』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일성록』
『한국성인의 천주신앙』(이원순, 분도출판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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