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이덕형(李德馨)의 7대 손이다.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이종한(李宗漢)이고,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정현서(鄭玄瑞)의 딸이다.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홍낙민(洪樂敏)과는 사돈 간이며 교우가 두터웠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 뒤 현감까지 지내다가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부수찬이 되었다. 이어 검상·승지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부윤으로 나갔다.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천주교 교리를 직접 접하고, 귀국하여 이가환·이벽(李檗) 등과 사귀었다.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과 그 질서, 인간 영혼과 후세 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했다. 결국 이 토론에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서 자처했다.
이후 병조참판·우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1801년(순조 1)에는 대사간·예조참판·좌승지를 역임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은 이기양이 천주학에 빠져들자 장문의 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들 이총억(李寵億)이 신자였던 관계로 반대파들은 이기양을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비난하였다. 그 자신도 친국소에서 무답으로 응하여 단천에 유배되었다.
죽은 후인 1809년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의 요청으로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복암유고』가 있으며, 편서로는 『한음문고부록(漢陰文稿附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