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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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물
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 성인(聖人).
이칭
이칭
가롤로, 명철, 경우(京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96년(정조 20)
사망 연도
1839년(헌종 5)
출생지
강원도 회양
관련 사건
기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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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 성인(聖人).
생애 및 활동사항

1796년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출생했다. 세례명은 가롤로이다. 5세 때 모친을 잃었고, 집안의 가산이 없어지자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몇 년 후 환속한 그는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다가, 23세부터 서울 서소문 밖에 거주하며 동지사(冬至使)의 마부로 일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도와주었다.

30세 경 정하상(丁夏祥)과 유진길(劉進吉)을 알게 되었고, 유진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리고 1826년에는 유진길과 함께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여 세례·견진·고해·성체성사를 받았다. 이후 조신철은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하여 1834년에 여항덕(余恒德 또는 유 파치피코) 신부, 1836년에 모방(Maubant) 신부, 1837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와 앵베르(Imbert) 주교 등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애주애인(愛主愛人)하는 마음이 강하여,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특히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아내를 인내와 노력으로 입교시켜 선종(善終)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처음 지방에서 성사(聖事)를 줄 때에는 한국말이 서툰 신부를 도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아내가 죽은 후 최영이(崔榮伊) 성녀와 재혼하였다. 그런 가운데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조신철은 가족과 함께 이러 저리 피신하다 처가로 갔다. 그러나 5월(음) 어느 날 포졸들이 처가를 습격하여 어린 아이까지 잡아가는데, 외출에서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한 조신철은 포졸들 모르게 가족들을 따라갔다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데, 이는 북경에서 가져온 물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며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인도한 행동이 역모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신철은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나 신자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1839년 8월 19일(음) 여덟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참고문헌

『일성록』(헌종5년, 8월 15일조)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중(서종태·한건 역음, 국학자료원, 2004)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최양업 신부 역·배티 사적지 편, 천주교 청주교구, 1997)
『한국천주교회사』중(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기해일기』(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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