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세 즈음 정하상(丁夏祥)과 유진길(劉進吉)을 알게 되었고, 유진길에게 교리를 배워 주4. 1826년에는 유진길과 함께 베이징[北京] 주5을 방문하여 세례 · 주6 · 주7 · 성체 주8를 받았다. 이후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베이징 교회와 연락을 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하여 1834년에 여항덕(余恒德, 유 파치피코) 신부, 1836년에 모방(Maubant) 신부, 1837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와 앵베르(Imbert) 주교 등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 데 크게
애주애인(愛主愛人)주9하는 마음이 강하여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선교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특히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아내를 인내와 노력으로 입교시켜 주10 하였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처음으로 지방에서 성사(聖事)를 줄 때에는 한국말이 서툰 신부를 도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도왔다.
아내가 죽은 후 최영이(崔榮伊) 주11와 재혼하였다. 그런 가운데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가족과 함께 이러저리 피신하다가 처가로 갔다. 그해 5월(음력) 주12들이 처가를 습격하여 어린아이까지 잡아가는데, 외출에서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하여 포졸들 모르게 가족들을 따라갔다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수하였다.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왜냐하면 베이징에서 가져온 물건이 발견되었고,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인도한 행동이 주13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지켰고, 교회나 신자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1839년 9월 26일(음력 8월 19일)에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주14.
1925년 7월 5일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주15, 1984년 5월 6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주16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