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일찍부터 북경에 세워져 있는 신심조직과 비슷한 회를 본떠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뜻의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회장에는 정약종(丁若鍾)을 임명하였다. 명도회원들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해 깊은 지식을 얻도록 노력하고, 다음으로는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外敎人)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 주었다.
주문모는 이 회를 위하여 개최되는 장소, 사회자의 임명, 남녀가 유별될 것 등을 규정해 주었다. 그 뒤, 회세(會勢)는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엄격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명도회규(明道會規)도 주문모가 직접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는데 그 회규 자체는 오늘날 전해진 것이 없다.
주문모에 의해 임명된 명도회의 사회자는 회원들에게 매월 그 달의 주보성인(主保聖人)이 지정되어 있는 회원권을 나누어 주었다. 명도회에 가입하는 절차이기도 한 이러한 회원권 제도를 당시의 신자들은 보명(報名)이라고 불렀다.
보명이란 열심한 신자를 신부에게 알리면 신부가 교회의 성인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어 보내고 연말에 신자의 부지런함 여부와 전교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입회 여부를 결정하였다.
또 명도회의 집합장소는 여섯 군데가 있어 이를 육회(六會)라고도 불렀는데, 그 중 다섯 곳은 홍필주(洪弼周)·홍익만(洪翼萬)·김여행(金勵行)·현계흠(玄啓欽)·황사영(黃嗣永)의 집이었다고 한다.
명도회의 지방에서의 활동은 자료의 부족으로 분명하지 않으나, 서울에서만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음이 확실한데, <황사영백서 黃嗣永帛書>는 이에 관하여 “회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도 이에 감화되어 모두 전교를 일삼았으므로 경신년(1800) 가을과 겨울에 걸쳐 하루하루 입교자가 불어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와 회장 정약종 등 지도자가 모조리 순교하는 바람에 그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 조직은 꾸준히 존속된 흔적이 있다. 현재 각 교구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도회 또는 명도원 같은 단체는 이름만 같을 뿐 이 명도회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