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가롤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순교한 계흠(啓欽)의 아들이다.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아내와 딸 그리고 누이 경련(敬蓮)이 1839년 기해박해 때 옥사하였다. 일생을 성직자와 교인들을 돌보는 일에 바쳤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L. M., 范世享) 주교를 무사히 입국하게 하였고, 샤스탕(Chastan, J., 鄭牙各伯) 신부의 복사(服事)가 되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성무를 돕는 한편,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전심하였다.
1838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포도청에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 하려 하였으나 성직자들이 이를 말렸고, 앵베르가 순교하기 전 조선교회를 그에게 맡겼으므로 이재영(李在永)이라는 가명으로 숨어 다니며 살아남은 교인들을 격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 그들을 포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박해가 멈추자 살아남은 최희원(崔希遠), 모방(Maubant, P., 羅伯多祿)의 복사 최형(崔炯), 이승훈(李承薰)의 손자 재의(在誼) 등의 협조를 얻어 순교 자료를 모으고 확인, 보충하여『기해일기』라는 순교자 전기를 작성하였다. 여러 번 교인을 북경에 보내어 성직자와의 연락을 도모하였고,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입국하였다가 곧 상해로 다시 건너갈 때 동행하기도 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서울에 돌아온 뒤 사들인 집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명의로 등기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소식을 듣고 다른 곳으로 옮겼으나, 곧 거처가 알려져 1846년 7월에 잡혀 9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성인품에 올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