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토마스. 본관은 평창(平昌).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이다. 이승훈의 세 아들(宅逵·國逵·身逵) 중 아버지 택규와 작은아버지 신규는 천주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그도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가까이하였고, 정하상(丁夏祥)과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교리를 배웠다.
1837년(헌종 3)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주교가 조선에 들어오자, 세례를 받고 그의 복사(服事)가 되어 주교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가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나, 그는 홍주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고, 박해가 뜸해지자 현석문(玄錫文) 등과 함께 교회재건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845년 김대건(金大建) 부제(副祭)가 입국할 때 의주 변문까지 가서 그를 무사히 서울까지 인도해왔고, 김대건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갈 때 현석문·최형(崔炯)과 함께 동행 하여 상해(上海)로 가서 김대건의 사제서품식에 입회한 다음,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부임하게 된 페레올(Ferreol)주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 뒤 현석문과 함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등 주교를 도와 활동을 계속하던 중, 1846년 병오박해로 김대건이 체포될 때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체포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후 교회와 멀어졌던 이재의는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1868년 4월 포도청에 체포되었다. 그러다가 오페르트 사건으로 박해가 격화되면서 윤4월에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심문을 받은 후 외국인 주교를 국내로 인도해왔다는 죄목으로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가 적용되어 5월 2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