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세례명은 비비안나이다. 신궁(新宮)의 나인(內人)이었다. 중인 집안의 다섯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벼슬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였다.
7세 때인 1783년에 신궁 나인으로 뽑혀 궁녀가 되었고, 나이가 든 후에는 글씨를 잘 써 궁에서 문서 쓰는 일을 맡았다. 1797년에 병이 들어 사가(私家)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자신의 집을 출입하던 실장수 노파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리고 강완숙(姜完淑)의 집을 왕래하며 교리를 배워 1798년에는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에도 강완숙의 집을 드나들며 첨례(瞻禮)와 교리 강습에 참여하였다.
사가에 있으면서 문영인의 병은 거의 완쾌되었으나, 궁에서 사람이 나올 때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궁녀들 사이에는 그녀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마침내 1798년 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이즈음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청석동에 따로 집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다.
문영인은 1800년에 강완숙의 요청에 따라 두 달간 정약종(丁若鍾)에게 집을 빌려 주었고, 김섬아와 함께 몇 년간 주문모 신부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이후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주문모 신부가 다른 곳으로 피신하자,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순교할 시기를 기다리다 체포되었다.
포도청으로 끌려온 문영인은 처음에 주뢰형을 참지 못해 배교한다고 하였으나, 얼마 뒤 배교를 철회하고 만 번 죽어도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 결과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강완숙 등 8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문영인이 포도청에서 고문을 당할 때, 다리에서 나온 피가 꽃 모양으로 변하여 공중에 떠있었고, 참수될 때에는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