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양반 신분으로 1791년 이전부터 경기도 이천의 동산밑(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동산리)에서 살았다. 1남 1녀를 두었으며, 1839년 11월(음)에 순교한 복자 최증애(崔曾愛)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1801년 이후에는 홀아비로 행상을 하며 생활했다.
천주교는 1791년 이전에 남인 계통의 양반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1795년 무렵에야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신태보는 1~2년을 낙심하며 보내다가, 신앙을 다시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촌 이여진 외에 아는 신자가 없었고, 기도서도 모두 잃어 신앙을 실천할 방법이 막연했다. 그러던 중 순교자의 유가족이 용인에 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찾았으며, 그들과 함께 교회 서적을 읽고, 신자로서의 의무를 실천했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지역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있어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어려워지자 신태보는 40명이 넘는 신자들을 데리고 강원도 산골로 이주하였다.
조선의 신자들은 신유박해 이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성직자를 다시 영입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여진은 1811년 말에 북경으로 가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하였다. 이여진은 1812년 혹은 1813년 말에도 북경에 파견되었으나, 이 시기 신자들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신태보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할 때, 경비를 마련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천주교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밀사 파견에 관여한 이후 신태보는 더 이상 교회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경상도 상주 지방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필사한 서적들이 신자들에게 많이 배포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교우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고 이에 박해가 발생하면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발생하자, 신태보는 며느리와 함께 피신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피신하기 직전인 1827년 4월 22일(음) 전주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상주 관아를 거쳐 전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배반하지 않았고, 동료들이 있는 곳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 결과 5월(음)에 사형 죄인으로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신태보에 대한 처형은 곧바로 시행되지 않았고, 수감된 지 12년이 지난 1839년에야 기해박해의 여파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신태보는 1839년 4월 17일(음) 전주 장터에서 4명의 동료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123위 시복 자료집』제5집(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2008)
『한국천주교회사』중(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