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혜 ()

천주교
인물
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 성녀(聖女).
이칭
이칭
엘리사벳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797년(정조 21)
사망 연도
1839년(헌종 5)
본관
나주
출생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관련 사건
기해박해
정의
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 성녀(聖女).
생애 및 활동사항

1797년 경기도 광주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정약종(丁若鍾)과 유 체칠리아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세례명은 엘리사벳이다.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丁哲祥) 복자(福者)와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丁夏祥) 성인의 동생이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다. 4세 때인 1800년에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의 서부(西部)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적몰되고, 의지할 곳이 없게 된 그의 어머니는 친척의 주선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갔다. 그러나 친척들은 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비난과 멸시, 협박과 학대를 하였다.

정정혜는 어머니에게 기도문과 교리를 배우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일찍부터 동정(童貞)을 지키기로 뜻을 정했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바느질과 길쌈을 익혀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전에 적대시하던 친척들을 감화시켰고,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1814년경 마재를 떠난 정하상은 8~9차 북경을 왕래하며 성직자를 조선에 모셔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36년부터 1837년 사이에 모방(Maubant) 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가 차례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런 가운데 마재에 있던 유 체칠리아와 정정혜도 서울로 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입국한 이후, 정정혜는 교우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성사(聖事)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리고 가난했지만 애긍(哀矜)에도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주교와 신부들을 매우 헌신적으로 보살폈고, 네 차례나 집에 모시기도 했다. 그리하여 앵베르 주교는 정정혜가 여회장의 소임을 맡을만하다고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하여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정정혜도 교우들을 위로하고, 붙잡힌 신자들을 돌보다가 6월 9일(음)에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형벌과 신문을 받았으나 배교하지 않았고, 10월 2일(음)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11월 24일(음) 서소문 밖에서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참고 문헌

『기해일기』(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한국천주교회사』중(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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