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때인 1800년에,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의 서부(西部)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주2이 주3, 의지할 곳이 없게 된 그의 어머니는 친척의 주선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갔다. 그런데 친척들은 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비난과 멸시, 협박과 학대를 하였다.
정정혜는 어머니에게 기도문과 교리를 배우며 주4을 하였고, 일찍부터 주5을 지키기로 뜻을 정했다. 자라서는 바느질과 길쌈을 익혀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모습에 이전에 이들을 적대시하던 친척들이 감동하였으며,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1814년경 마재를 떠난 오빠 정하상은 89차례 베이징[北京]을 오고 가며 성직자를 조선에 모셔 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36년부터 1837년 사이에 모방(Maubant) 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가 차례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사이 마재에 있던 정정혜와 유 체칠리아는 서울로 와서 살았고, 이후 충청도 단양으로 내려가 67년 거주하다가 다시 서울로 갔다.
성직자들이 입국한 이후, 정정혜는 주6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성사(聖事)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리고 가난했지만 애긍(哀矜)에도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주교와 신부들을 매우 헌신적으로 보살폈고, 네 차례나 집에 모시기도 했다. 그리하여 앵베르 주교는 정정혜를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하여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정정혜도 교우들을 위로하고 붙잡힌 신자들을 돌보다가 7월 19일(음력 6월 9일) 무렵에 체포되었다. 여러 차례 형벌과 신문을 받았으나 주7 않았고, 11월 7일(음력 10월 2일)에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12월 29일(음력 11월 24일)에 서소문 밖에서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주8. 1925년 7월 5일에 주9 비오 11세에 의해 주10, 1984년 5월 6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주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