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기해박해 당시의 순교자.
내용
이 때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순조 24) 동지사의 수석역관으로 북경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그 뒤로는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1825년(혹은 1824년) 교황에게 성직자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여러 차례 걸쳐 북경을 내왕하면서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즉 여항덕) 신부, 1836년 모방(Maubant)신부, 1837년 샤스탕(Chastan)신부와 앵베르(Imbert)주교를 맞아들인 수 있게 되어, 조선교회는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춘 교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자 그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서양성직자영입의 책임은 모두 자기에게 있음을 확언하면서 호교론을 펴 박해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모역죄로 몰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정하상과 함께 참수되어 4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시성(諡聖)되었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사학모반죄인양한진길등국안(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鞠案)』
-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Dallet,C.C. 저, 최석우·안응렬 역주, 분도출판사, 1980)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