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자는 용선(用善), 본관은 한양이다.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807년(순조 7) 역과에 합격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고 많은 서적들을 통독하던 중 우연히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알게 되어 읽고, 천주교에 흥미를 느껴 교리를 터득한 뒤 1823년경에 입교하였다.
이 때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의 연락과 성직자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순조 24) 동지사의 수석역관으로 북경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그 뒤로는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1825년(혹은 1824년) 교황에게 성직자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여러 차례 걸쳐 북경을 내왕하면서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즉 여항덕) 신부, 1836년 모방(Maubant)신부, 1837년 샤스탕(Chastan)신부와 앵베르(Imbert)주교를 맞아들인 수 있게 되어, 조선교회는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춘 교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자 그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서양성직자영입의 책임은 모두 자기에게 있음을 확언하면서 호교론을 펴 박해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모역죄로 몰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정하상과 함께 참수되어 4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시성(諡聖)되었다.